나이가 들수록 불교를

제재로 쓴 시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시는 깨달음이 아니다

중생 삶의 구체적인 진술이다

그냥 먹고 자고 똥 누는

중생의 생활감정일 뿐이다

우리가 처한 삶의 비위와 원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정법사는 시드니에 있는 절이다. 2014년 여름 아내와 같이 방문을 했다. 호주 문인들과 인연이 되어 시 창작 강연을 갔다가, 절에서 강연을 한 번 더 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주제는 ‘불교체험과 시’였다. 이런 주제로는 한 번도 강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좀처럼 갖기 어려운 법당 강연을 준비하느라 그동안 낸 시집들을 뒤적거렸다. 나이가 먹을수록 불교를 제재로 쓴 시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쓴 첫 불교제재의 시는 ‘운장암’일 것이다. 운장암은 시골 동네 뒤 연화산에 있는 절이다. 운장암이 있는 산을 연화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네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불교사전을 통해서 찾아낸 것이다. 운장암은 주변에 절이 드물어 동네 어른들이 다니던 절이다. 운장암을 제목으로 쓴 한 편의 시가 더 있다. 최근 시집 <담장을 허물다>에 실려 있다. 한때 젊은 스님이 있어서 자주 찾아갔었는데, 그 재주 많던 스님을 상정하고 쓴 시다. 

짧은 시라서 인용을 한다. “풀 비린내 푸릇푸릇 나는 젊은 스님은/ 법당 문 열어놓고 어디 가셨나// 불러도/ 불러도/ 기척이 없다// 매애/ 매애/ 풀언덕에서 염소가// 자기가 잡아먹었다며/ 똥구멍으로 염주알을 내놓고 있다”(‘운장암’ 전문) 재미있게 썼다.

그리고 남양주 수종사에 놀러갔다가 쓴 시가 ‘수종사 풍경’이다. 시집 ‘소주병’의 첫 시다. 시집의 첫 시는 독자를 유혹하는 호객 역할을 해야 하니 어지간히 만족스럽지 않고는 앞에 두기 힘들다. 그리고 가장 불교의 맛을 내는 시는 아마 ‘법성암’일 것이다. 어머니가 다니던 청양 읍내에 있는 절이다. 법성암 이야기는 최근 낸 산문집 <맑은 슬픔>에 실려 있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 염주’와 ‘무량사 한 채’는 아내의 인체 일부와 전부를 염주와 절에 비유한 것이다. 밥과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주무르고 집안 청소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보면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게 된다. 거기다 식구 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어서 똥오줌이라도 받아내다 보면 관절염이 걸리기 십상이다. 관절염이 걸려 뭉툭해진 손가락 마디가 염주알이라는 것이다. 이런 염주알을 쥐고 사는 사람이 많다. 또 무량사는 고향과 가까운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절이기도 한데, 희생이 무량한 아내를 비유한 것이다. 아내가 뼈와 살로 짓는 움직이는 무량사 한 채 라는 것이다. 

이런 시적 경향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선배도 있다. “시가 무슨 깨달음이냐?”고도 하고, “요즘 시인들이 다 선승이고 도사들이야”라고 비꼬기도 한다. 시집에 선적 상상력이나 깨달음이 많은 걸 가지고 비판하는 이유는 안다. 시가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도. 시는 중생 삶의 구체적 진술이다. 개인 경험의 고백이 강해서 질척하다. 윤리나 도덕과도 상관이 없다. 그냥 먹고 자고 똥 누는 중생의 생활감정에 대한 진술일 뿐이다. 이러면서 중생들이 처한 삶의 비의와 원리를 발견 해내는 것이 시다. 

아무튼 시드니 정법사 강연 덕분에 그간 불교를 제재로 쓴 시를 전부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잠깐이나마 법당을 내주신 기후스님, 시내를 안내한 유영재 시인, 방을 내준 강애나 시인, 울릉공에 동행했던 유금란 김인옥 시인, 블루마운틴을 경험하게 한 김오 백경 시인, 저녁을 마련한 김복례 시인, 박종우 님 부부 등 동그라미문학회와 캥거루문학회 동인들에게 지면으로 늦은 감사인사를 드린다. 

[불교신문3275호/2016년2월22일자] 

공광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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