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곳곳마다 평화의 불 수놓다

혜자스님 지음 시간여행

 

휴전선을 찾아 평화의 불을 밝히며 통일을 기도하고 있는 혜자스님

불자들의 새로운 신행문화를 만들어 낸 108산사순례기도회는 매달 한 곳의 사찰을 찾아 기도와 문화체험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답사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도안사 주지 선묵혜자스님이 작은 불씨를 이운해 법당에 불을 밝힌다. 그 불은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에서 가져왔다. 2013년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혜자스님이 룸비니에 있는 평화의 불을 이운한 것이다. 히말라야와 세계 53개국에서 피워 올린 불을 하나로 합친 ‘UN 평화의 불’로, 불씨가 한국에 오기까지 긴 여정이 있었다. “불을 가지고 비행기에 탈수 없어” 육로를 이용해 이운해야 했다. 혜자스님이 펴낸 <평화의 불 수놓다>는 평화의 불에 담긴 의미와 이운의 여정을 생생한 사진과 글로 담은 책이다.

2006년 108산사순례기도회를 발족한 혜자스님은 2008년 부처님 진신사리 8과를 얻었다. 이에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 사리 일부를 봉안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전세기를 동원해 300여 명과 네팔로 향했다. 출발 전, 국가정보원과 총무원에서 “네팔 정세가 불안해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가지 말 것을 권했다. 반면 장기간 여행객의 발길이 끊어진 네팔에서는 정부가 나서 “안전을 보장할테니 와 달라”고 권유했다. 여행객의 안전을 알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혜자스님은 며칠간 고심한 끝에 순례를 떠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네팔 카투만두에서 룸비니로 가는 길 중간을 시위대가 막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정부군이 무장을 하고 대치한 상태였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으면 되느냐”는 정부측의 설득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오는 동안은 잠시 시위를 중단하겠다”며 시위대가 길을 텄다. 그리고 양측은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다. 108산사순례기도회가 진신사리를 룸비니에 봉안하고 오는 3일간 사이, 대화를 재개한 양측은 수차례 회담 끝에 오랜 대립을 종식했다.

네팔 대통령에게 룸비니 평화의 불씨를 전달받고 있는 혜자스님

정부에서는 “이적이 일어났다”며 혜자스님 일행에게 평화훈장을 전달하고 감사의 뜻으로 룸비니 동산 내 2000여 평 부지를 순례기념탑과 ‘평화의 종’ 건립을 위해 제공했다.

4년 후, 금강산 순례길을 막히는 등 남북대립이 심화되자 혜자스님은 룸비니동산 평화의 불을 떠올렸다. 그 불씨를 가져와 한반도 곳곳에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은 육로를 통해 이운하는 방법 뿐이었다.

스님은 네팔 람바란 야다브 대통령이 직접 전달한 평화의 불을 가지고 티베트 고원을 넘어 신장위구르, 파키스탄, 타클라마칸 사막과 둔황을 걸쳐 청도로 왔다. 청도에서 인천까지는 뱃길을 이용했다. “당장 무너질 듯한 절벽길을 지나고, 햇빛이 이글거리는 사막을 건너고, 고산증으로 고역도 치르며” 20,000km의 길을 달린 끝에 30여 일만에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인천항에서 곧장 임진각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그날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져 점화 행사가 어려워 보였어요.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가보자며 임진각에 가는데, 점차 빗줄기가 적어지더니 행사 시간이 되자 화창하게 개였어요. 많은 사람들의 지극한 마음이 모인 결과였습니다.”

이후 스님은 순례를 갈 때마다 평화의 불을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전국 70여 곳 사찰과 중국, 미얀마 등 해외 7개 사찰에 봉안됐다. 현재는 휴전선을 따라 33곳의 군법당에서 평화의 불을 밝히는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란다.

“인류에게 불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불을 만나 빛과 온기를 얻고, 문명을 일으키며 화합을 이뤘어요. 올림픽 성화를 봉송하고, 연인들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사랑을 나누고,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더 나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등 모두 불이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마음이 담긴 평화의 불은 남북이 언젠가 함께 손을 잡고 평화를 일궈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울진 불영사에 평화의 불을 전하는 모습

이 책에서 혜자스님은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에서 시작해, 20,000km에 달하는 평화의 불씨 이운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담았다. 사진은 당시 이운에 동행한 KBS 카메라팀의 영상에서 발췌한 것이다.

선묵혜자스님은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도선사에서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불교신문사 사장과 도선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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