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그게 누구든 

마주 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좋은 인연이 끝났다 느낄 때

끝남이 서러울 때

‘렁캔서 터미널’을 생각한다

잠시 아픈 숨을 고른 뒤 

새로 출발하는 표를 끊어 

버스에 오른다 

새로운 인연을 생각하며…

‘렁캔서 터미널(lung cancer terminal)’은 의학에서 쓰이는 용어다. 번역하면 ‘폐암 말기’를 뜻한다. 폐암을 가리키는 ‘렁캔서(lung cancer)’와 종착역·종점을 의미하는 ‘터미널(terminal)’이 합쳐진 말이다.

어느 공중파 방송의 의학 드라마에서는 인물들 간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요소로 이 의학 용어가 등장했다. 극중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노인이 인공 심장 교체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으나 검사 결과 ‘렁캔서 터미널’이라는 추가 질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폐암 말기 선고는 의학계에서 사망 선고와 다름없이 여겨진다. 극은 인물에게 주어진 폐암 말기의 상황을 두고 인공 심장 교체 수술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관계의 마지막’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구해 오던 나에게는 극중에서 자주 거론된 이 ‘렁캔서 터미널’이 엉뚱하게도 관계에 대한 사망 선고처럼 다가왔다. 

여행의 시작점인 동시에 끝점이기도 한 터미널은 공간적으로 출발하기도, 마무리하기도 하는 곳이며 잠시 머무르는 경유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터미널을 ‘종착하는 곳’으로 한정한다. 영어 터미널(terminal)은 ‘끝나다, 종료되다’의 뜻을 가진 동사 ‘terminate’에 그 어근이 있다. 이로 보면 터미널을 종점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처음 ‘렁캔서 터미널’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관계의 마지막’에 대해 답을 희구하던 나도 ‘관계의 끝’만으로 의미를 한정하며 사망 선고를 내려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이어나가기 괴로운 인연을 끝내는 방법으로 만나지 않고,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 인연이 끝났다고 믿는다. 하지만 끝내고 싶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외견상 끝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한번 맺어진 인연은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이 마감될 때까지 계속해서 풀어가야 하는 보이지 않는 숙제로 끝끝내 남아 있다. 

‘렁캔서 터미널’이 준 사망 선고처럼, 풀기 어렵고 힘든 관계는 ‘잘 끝내는 것’이 현명한 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터미널’은 앞서 말했듯 시작인 동시에 마무리 지점, 경유지가 되기도 한다. 사람 관계도 터미널에 빗대어 보면 관계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선다. 시작하고 거치고 마무리되고, 다시 시작하고 거치고 마무리된다. 반복되며 끊임없이 회전할 뿐이다. 나는 어느 한 종교에 귀속된 몸이 아니지만 분명 어떤 교리에서는 인연에 대해 이와 같이 설파할 것이라 믿고 있다. 

한편, 인연은 나쁜 인연과 좋은 인연이 있어서 나쁜 인연을 끝내는 것보다 좋은 인연을 끝내야 할 때 조금 더 안타깝다. 이별은 그게 누구든 마주 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좋은 인연이 끝났다고 느낄 때, 끝남이 서러울 때, 이 ‘렁캔서 터미널’을 생각하기로 했다. 인연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터미널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잠시 아픈 숨을 고른 뒤 새로 출발하는 표를 끊어 버스에 오른다. 끝난 것을 다른 모습의 관계로 끌어올리고, 새롭게 시작될 인연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 필자 신효순 시인은 경북 봉화에서 출생,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15년 월간 <유심>으로 등단했다.

[불교신문3268호/2017년1월25일자] 

신효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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