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였는데 어머니를 여의었다. 상규는 허탈감이라기보다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 허무의식까지 함께 찾아왔다. 도대체 사람이 태어나 산다는 것, 이것이 뭔가. 서당에 다니며 학문을 닦는다는 것, 그것 또한 하릴없는 짓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당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처음 보는 손님을 맞아 어머님의 타계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이리 올라와 인사드려라.”

마루로 올라가 절을 하니 손님이 아버지를 보고 물었다.

“내가 여길 떠난 뒤 낳았다는 아들인가?”

“그렇다네….”

“허생원님이시다. 예전에 이 아래 동네에 사셨는데, 지금은 남원으로 이사해 남원에서 사신다.”

상규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손님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이 준수하구나.”

손님이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 정조대왕 치세 때 전라감사로 내려온 이공(李書九)이 요 앞 도주막에 앉아 자네 집터를 보고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허! 대도인이 나올 자리로구나’ 그러고는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는 것 아는가?”

“그야 꾸며낸 이야기겠지.”

“아닐세, 자네 아들놈 얼굴이 범상치 않아.”

상규는 듣는 둥 마는 둥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그 때는 고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 했으나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쥐었다. 안동김씨 척신들을 내쫒기 위한 합작품이었으니 물론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하나 1860년을 전후해 외국 이양선이 근해에 자주 나타났고,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면서 봉건체제를 위협했다. 거기에 가혹한 조세수탈과 관료들 부정탐학의 오랜 적폐로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되어 진주 상주 등 20개 군현, 전라도 장흥 익산 함평, 제주 등 37개 군현, 충청도 공주 은진 회덕 등 12개 군현, 함경도 함흥, 황해도 황주, 경기도 광주에서 농민항쟁이 그치지 않았다.

대원군은 집권 초부터 쇄국정책으로 맞섰고, 김씨 척신들에게 당한 왕권의 수모를 모면하고자 1867년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홀로 자란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채택했다.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회복한다고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을 발행해 통용했으나 그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청나라와 사대적 외교만 빼고 모든 대외의 채널을 차단했다. 일본 메이지정부를 서양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여겨 전통적 교린관계마저 끊어 버렸다. 똥구멍에 불송곳도 안 들어간다는 말은 고집만 세 미련한 놈을 가리킨 말이지만, 얄팍한 문자가 머리에 든 통보수 똥고집은 쇠심줄처럼 질기다. 이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면 도랑 막고 고래 잡는다고 큰소리를 뻥뻥 때리지만, 실인즉, 앞문으로 들어오는 호랑이도 못 막고 뒷문으로 승냥이만 불러들인다. 척신정치에 치를 떤 대원군은 혈혈단신인 민비를 며느리로 맞았으나 얼마 안가 갈등이 생겨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리 되니 쇄국정책이 죽지 부러진 보라매가 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민란, 나라밖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다 나서 군함에 신무기를 장착하고 “야, 때려 부수기 전에 빨리 문 열어!”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 틈에 생쥐 같은 일본 놈들이 군함으로 부산항에 쳐들어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1876년 ‘조일수교조규’라는 조선을 ‘호구’로 취급할 조약을 맺어 항구를 열었다.

나라가 오뉴월 마파람에 돼지꼬리 놀듯 할 때, 상규의 학문은 참득고 간득원(站得高 看得遠)이라던가, 높이 서면 시야가 넓어 멀리 보여 눈앞에 이익을 보지 않고 다양한 시각으로 두루 있는 사물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갖춰졌다. 유가의 덕치주의는 말할 것 없고 묵가의 검약, 법가의 법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했다. 주역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형이상학적 발돋움을 했다. ‘역(易)’자를 사물 형상을 본떠 만든 글자로 보았을 때, 맑은 구슬 속에 눈깔 같은 것이 박힌 형상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들어있는 동공 같은 것을 파랗게 보면 파랗고, 노랗게 보면 노랗고, 까맣게 보면 까매 형형색색으로 변했다. 그것이 ‘날 일’자라는 것이다. 이리 변화무쌍한 물체가 도마뱀 머리가 되어 기어간다는, 날 일(日) 밑에 도마뱀이 역(易)이다. 도마뱀이 없을 물(勿)자로 표기되어 글자 그대로 풀면 ‘날이란 없다’ 이런 황당무계한 글자였다.

상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역(易)이 의사소통의 언어가 없고, 문자가 없을 때 성냥개비 같은 것을 이리 놓고 저리 놓아, 앞날을 예단해왔던 것이 나중에 자연과학과 생물과학을 연관시켜 확립한 이론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역은 ‘매우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을 가리키는가 하면, 극도로 개인적인 삶의 방식이나 통로’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 거기에다 ‘시간, 장소, 상황에 따른 과정, 수단, 해결방식 등 근본적인 이치가 개인적 영감에 의해 여러 갈래로 깨달아 알아차리게’ 하는 데 활용되어 왔다고 했다.

공자가 주역을 해설한 <계사전>을 읽던 어느 날 상규는 꿈을 꾸었다. 붉은 깃털의 수탉이 떼를 지어 하늘을 쳐다보면서 꼬끼오! 하고 울었다. 그 때 상규는 ‘하늘이 도우면 상서로워 이롭지 않는 것이 없다’는 계사전 내용을 읽을 때였다. ‘하늘이 돕는 것은 도리이고, 사람이 돕는 것은 진실함’이라 했다. 진실을 실천하면 성실함으로 이어져 어진 이를 숭상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하늘이 도우니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그 구절의 잠재의식이 꿈이 되어 붉은 닭들이 홰를 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상규는 꿈속에서 남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산에 잘 쌓은 성곽이 있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다. 눈썹과 수염이 하얀 노승의 안내로 법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여러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고, 맨 왼쪽 부처가 상규의 손을 덥석 잡더니 손바닥에 ‘이(咡)’라는 글자를 써주었다. 이 글자를 널리 통용해 해석하면 입과 귀라는 뜻이고, 뒤에다 실사(絲) 자를 붙이면 ‘누에처럼 입을 뱅뱅 돌려 실을 뽑아낸다(咡絲)’는 뜻이었다. 그 때 범종소리가 꽝! 하고 울리더니 하늘이 부르르 떠는 소리가 들렸다. 상규는 깜짝 놀라 꿈을 깼다.

유가에서 ‘서쪽 오랑캐의 도’라고 하는 부처의 꿈이 웬 일인가. 어진 이를 숭상하면 하늘이 도와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계사전의 구절을 읽다보니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일까. 그 뒤 상규는 여러 날이 지났으나 꿈속에서 본 암자와 부처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는 날을 받아 꿈속에서처럼 남쪽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요천 상류를 따라 내려가다 유자광이 태어났다는 누른대삼거리에 이르렀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어느 길로 가야 꿈에 본 산과 암자를 찾을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랫길에서 유복에 동파관을 쓴 어른이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전에 뵌 적이 있는 허생원이란 분이었다.

“생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소곳이 인사를 드리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만있자, 네가 죽림리 백처사 아들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허! 많이 컸구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얼굴이 맑은 걸 보니 학문이 깊은 모양이구나.”

상규는 쓸데없는 칭찬이다 싶어 우스갯소리로 응대했다.

“저는 날마다 거울만 깹니다.”

“거울을 깨다니?”

“제 얼굴을 보면 돼지를 그려 붙인 것 같아서요.”

“허! 이 녀석, 말만 들어도 참새에 굴레를 씌우겠네….”

대번 말뜻을 알아듣고 허허 웃었다.

“어르신 어디로 행차하시옵니까?”

“고향에 벗들이 궁금해 오랜만에 올라온 길이다.”

“그럼 저희 아버님도 만나보시겠네요?”

“그야 두 말할 것 없지.”

“저를 만났다는 말씀은 드리지 마세요.”

허생원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암, 너 만한 나이 땐 아무도 모르게 도모할 일들이 많지.”

이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르신, 이 주변 어디에 혹 산성이 있습니까?”

“있지, 요 윗길로 조금 들어가면 교룡산에 처영대사가 쌓았다는 성이 있느니라.”

[불교신문3268호/2017년1월25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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