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에는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 즉 참회에 대한 

방법이 설해져 있다

그것은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이다

인생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보다는 오욕과 회한이 

적은 삶이 훨씬 더 값진 삶이고 

행복한 삶임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창밖 낮은 구릉에는 잎 진 나목들이 늘어서 있다.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어 아무데도 가리지 않은 저 나목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온다면 세상은 얼마나 청정하고 평화로울까?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가 항주자사로 부임해 그 지역에서 소문 난 스님인 도림선사를 찾아가 좌우명으로 삼을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도림선사는 <법구경>에 나오는 말씀인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말고(諸惡莫作)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라고 했다. 그러자 백거이가 “그거야 어린애도 다 아는 말이 아닙니까?”라고 하니 도림선사는 “어린애도 다 아는 말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말일세”라고 답했다. 선(善)을 머리로 알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 쓸 데가 없다. 선은 실천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런데 지은 죄를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지은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변명하거나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사람이다. 

잘못을 했으면 반드시 반성하고 자신이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래야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천수경>에는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 즉 참회에 대한 방법이 설해져 있다. 그것은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이다. 사참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이 지은 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선업을 지어서 자신이 지은 죄업을 상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참은 자기 마음속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만약 그런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그 생각을 지워버림으로써 죄짓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농단한 세력들을 향해 반성과 참회를 요구하는 동시에 그 잘못에 대해 책임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하며 헌법을 파괴한 세력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들은 참회하기는커녕 잘못을 은폐하고 변명하기에 바쁘며, 나아가 지금의 사태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진영논리로 왜곡하고 있다. 추운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 때문에 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소수 기득권층이 부정과 부패, 특권과 반칙, 억압과 통제로 그들의 입지를 철벽처럼 공고히 하기 위해 저지른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거리에서 촛불을 든 순수하고 애국적인 시민들에게 색깔론은 씌우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라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백성이다. 지금이라도 국정농단세력은 국민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회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이다. 또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인생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보다는 오욕과 회한이 적은 삶이 훨씬 더 값진 삶이고 행복한 삶임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불교신문3266호/2017년1월18일자] 

최탁환 논설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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