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리 용맹할까

瓶錫空山索然

若枯木死灰何其靜也

一日杖釖而起

斫賊如麻何其勇也

吾不信

佛氏之有體而無用也

 

물병과 석장뿐인 빈산의 고요함은 

고목이 죽어 재가 된 듯 어찌 그리 고요한가?

하룻날에 큰 칼을 들고 일어나 

적 무찌르기를 삼을 베듯 하였으니 어찌 그리 용감한가? 

나는 믿지 못하겠네. 

불교에는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다고 하는 것을.

 

통도사에 모셔진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스님의 진영에 적힌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영찬이다. 조현명은 영조시대에 탕평파를 이끈 거두로서 전라도관찰사로부터 이조·예조·공조 판서를 비롯해 우의정, 영의정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통도사 사명스님 진영에 적힌 풍원군은 조현명이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을 진압하기 위해 스스로 종사관으로 나서 공을 세운 후 받은 봉작이다. 따라서 이 영찬은 그가 풍원군에 봉해진 1728년 7월 이후에 지은 것이다.

영찬을 지을 당시 조현명은 자신의 행적이 이입된 듯 출가자로서의 투철한 수행이나 사상보다는 전란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전장을 호령했던 사명스님의 용맹함을 찬탄하는 글을 지었다. 조현명은 사명스님 영찬 외에도 영의정 시절인 1750년에 회암정혜(晦菴定慧, 1685~1741)스님의 영찬을 짓는 등 불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하였고 두 스님의 영찬은 이후 조현명이 직접 편찬한 자신의 시문집인 <귀록집(歸鹿集)>(1750)에 수록되기도 했다.

사명스님과 조현명의 인연은 영찬 이후에도 이어져 이조판서 시절인 1735~1736년에는 사명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기 불교계에서는 사명스님의 5세손인 태허남붕(太虛南鵬, ?~1777)을 중심으로 밀양 표충사를 중건하고 사명스님의 유고집인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1739)을 간행하고 <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1742)를 세우는 등 사명스님을 추모하는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에 발맞춰 남붕스님은 조현명을 비롯한 사대부 168명의 시문을 받아 1739년에 <표충사제영록(表忠寺題詠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18세기 전반, 사명스님의 후손들은 통도사에 새로 영정을 모시고 표충사를 중건하면서 불교계만이 아니라 사회지도인사들이 모두 스님의 업적을 기억하도록 했다.

[불교신문3266호/2017년1월18일자]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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