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생 이해 쉽게…친절한 부처님들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3대 불전’ 

진흙으로 조성한 비로자나삼신불

1747년 개금불사 사도세자 동참 

도량엔 ‘철로 만든 솥’ 역사 전해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 왼쪽부터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억불숭유 정책 아래에서 조선시대 불교계는 사찰 유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예경의 대상인 불보살상을 조성하는데 수많은 대중의 시주를 받아서 진행했고, 당시 불사 상황은 불복장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성 연도, 시주에 참여한 인물, 불사를 주도한 스님과 조각승, 시주 물품 목록, 불상의 이동 경로 등을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조선시대 불교조각이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해 9월 실크로드 천산남로를 순례 중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인 친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10월에 조사차 한국을 방문하니 만나자는 메시지였다. 한국을 방문한 그 친구와 함께 지난 해 10월 말 법주사를 방문했다. 

속리산 법주사는 서울에서 내려와 2009년부터 청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자주 가는 절이 되었다. 광활한 평지에 활짝 펼쳐진 법주사는 언제나 시원함을 선사한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지 않아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어느 덧 눈앞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철 당간이 보인다. 그 옆에는 커다란 철로 만든 솥이 있는데, 온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철 솥의 존재는 법주사에 많은 스님들이 거주했음을 상상케 한다. 

법주사 입구에 서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법주사에 머물던 3000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사용하던 식수를 담아두던 돌로 된 물통, 즉 석조(石槽)를 만나게 된다. 통일신라 때인 720년 경에 만든 것이라 하니 법주사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황준량(1517~1563)에게도 법주사의 철솥과 물을 담는 수조는 특별했나 보다. “옥 같은 기암절벽이 폭포에 씻기고/ 구곡의 절경은 별천지로구나/ 철솥을 만든 것은 어느 때였던가/ 석조가 가로 놓여 이 산천 짓누르네/ 법당에는 천 길 되는 불상을 안치하고/ 탑에서는 풍경 소리 골짝마다 전해지네.” 

조선시대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을 지나 법주사의 주불전인 대웅보전으로 가 보자. 임진왜란으로 불탄 대웅보전은 1624년 벽암각성스님이 다시 지었다. 앞면은 7칸이고 옆면은 4칸인 2층 건물이다. 부여 무량사 극락보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 가운데 하나란다. 

2층으로 된 대웅보전 안에 들어가면 커다란 세 분의 부처님 크기에 압도당한다. 아! 오늘은 무슨 말로 부처님과 대화를 할까. ‘100살이 되어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할까, 멋진 책을 한 권 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할까….’ 그러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절만 연신하다 부처님의 상호만 바라다본다.

불탑이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이라면,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복장(腹藏)의식이 행해져야 한다. 불상을 조성한 후 불상 안에는 경전을 비롯해 다라니 등과 다섯 가지 곡식과 다섯 가지 약 등 70여 종의 내용물이 담긴 후령통 등이 넣어진다. 또한 일종의 불상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불상 조성기가 들어간다. 불상 조성기는 발원문(發願文) 또는 복장기(腹藏記)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불상을 조성한 이유, 불상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 불상을 만든 장인들, 불상을 봉안한 장소와 연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불상의 내부를 조사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바로 부처님의 황금 옷이 헤어져서 새 옷을 해 드리는 일인 개금(改金)을 할 때는 복장을 여는 의식이 이뤄졌다. 2002년 4월에 법주사 대웅보전 복장품은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사들에 의해 조사됐다. 

‘대웅(大雄)’은 석가여래를 일컫는 용어 가운데 하나다. 대웅전의 주인공은 그렇기 때문에 석가여래다. ‘대광(大光)’은 큰 빛을 의미한다. 바로 비로자나불이 주인공으로 있는 불전이다. 법주사의 비로자나삼불상이 봉안된 불전은 주존불이 비로자나불임에도 현재는 ‘대웅보전’이다. 그러나 옛 기록에는 ‘대웅대광보전’으로 되어 있었으니, ‘대웅전’이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닌 듯싶다. 대웅보전의 세 불상은 1626년인 인조 4년 3월부터 7월24일에 걸쳐 조성되었다. 5개월에 걸친 짧은 시간 동안에 조성하면서 조각승만 17명이 참여했다. 이 불상 조성을 이끈 우두머리 조각승은 17세기에 큰 유파를 형성했던 현진(玄眞)스님이다. 그는 17세기에 활동한 여러 조각승 유파 가운데 선두 그룹에 속한다. 현진스님이 불상을 조성한 기간은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1612년에서 1637년으로 약 25년간이며, 경상북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경상남도,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을 대상으로 불상을 조성했다. 부여 무량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상 역시 현진스님이 조성한 불상이다. 

법주사 대웅보전 전경.

높다란 불단 위에는 중앙에는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본존불의 왼쪽(향우측)에는 노사나불, 본존불의 오른쪽(향좌측)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세 분은 삼신불(三身佛)로 중앙의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왼쪽의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상(아미타불상)이며, 오른쪽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타난 석가모니불상이다.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세 부처님은 모두 5m에 달하는 큰 불상이다. 1626년(인조 4)에 처음 만들어졌고, 1747년(영조 23)에 개금을 했다는 기록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됐다. 

비로자나불은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권인(拳印)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비로자나불상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과는 다른 것으로, 고려시대 불상에서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다.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이 하는 중생의 성품에 따라 설법을 하는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다. 보편적으로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지만 조선시대 조각승들은 좌우 대칭을 맞추기 위해 법주사 대웅보전 노사나불상처럼 왼손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른쪽의 석가모니불은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의 손모양인 오른손으로 지신(地神)을 부르자 마왕이 항복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세 분의 부처님 가운데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두 어깨를 모두 가리고 있지만, 좌우의 두 부처님은 한쪽 어깨를 모두 드러내지 않고 살짝 가리고 있다. 손 모양만 다를 뿐 전반적으로 비슷한 모습이다. 

소라가 붙은 듯이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곱슬거리고 머리 중앙에는 반달이 뜬 것처럼 빛나는 구슬 장식이 있다. 이 장식은 인도에서 상투끈을 장식했던 보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계주(珠)라고 하며, 고려 후기 불상에서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다. 중앙 정수리에도 또다른 구슬 장식이 있는데, 이것은 정상계주(頂上珠)이다. 정상 계주의 등장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불상의 특징이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썹, 반쯤 뜬 눈으로 중생을 바라다보는 두 눈, 수미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뚝 솟은 코, 입가에 은은하게 머금은 미소, 석굴암 부처님처럼 당당한 가슴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보듬어 줄 것 같은 넓은 가슴,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17세기 조각가 그룹을 형성했던 조각승 현진스님이 만든 불상의 특징이다. 대웅보전의 세 분 부처님은 내부는 나무로 짜 맞춘 후 바깥면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금칠을 한 소조불(塑造佛)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큰 불상은 대부분 이처럼 소조불로 된 경우가 많다. 

법주사 대웅보전 비로자나불상은 1592년 임진왜란에 화재로 소실되고 난 후 1626년에 다시 조성되었고, 124년 후인 1747년(영조 23)에 3월부터 시작해 7월 4일에 개금을 했다. 개금 때의 기록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숭록대부 지내시부사 이경화, 병마절도사 심봉양, 상주목사 이협 등 왕실과 고위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한 사실이 쓰여 있다. 이후 법주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시는 선희궁 원당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과 관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비로자나삼불상의 발원문이 발견되면서 1626년에 작성된 <법주사상량문>과 1630년에 쓰여진 <속리산대법주사대웅대광명전불상기(俗離山大法住寺大雄大光明殿佛相記)>를 통해, 1624~1630년으로 추정해 왔던 불상 조성 연도를 1626년으로 확정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복장품으로 넣었던 발원문, 복식류, 경전 등에 다양한 시주자 명단과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이 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법주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불상 조성기에 의하면 왕실이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불상 조성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개금기에는 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과 상주 목사 등이 시주자로 등장하고 있어, 조선후기 달라진 불교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불교신문3266호/2017년1월18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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