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와 입이 재앙이다 ① 

밀양 손씨를 아내로 맞은 죽림촌 백남현이 

하루는 꿈을 꾸는데, 눈썹이 하얀 고승이 찾아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온 ‘석가여래의 한 생각’이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 집에서 

‘지혜의 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깨달음을 열어 

후세에 이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똑같은 꿈을 백남현만 아니라 손씨도 꾸었고 

고종 원년(1864) 5월8일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국새부터 챙긴 대왕대비가 전교를 내렸다.

“흥선군 둘째 아들 이명복을 익종대왕 대통을 잇게 하라!”

33세 한창 나이인 철종이 숨을 거두기 바쁘게 ‘나라의 안위가 시각을 다툰다’는 단서를 달아 영중추부사 정원용에게 명했다. 대비는 ‘망극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나니 원통한 생각뿐’이라는 수식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으로 노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과거 경험이 되새겨진 반감의 한스러움이랄까, 기를 쓰고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무력감, 그런 회한에 찬 낯빛이었다. 백성들은 딸이 못나면 두 사돈이 망하지만, 왕실은 왕비가 못나면 왕권이 농단 당한다. 순간 대비의 머릿속에 안동김씨 척신들 얼굴이 빠르게 스쳐갔다.

어찌 되었든 정원영은 원상을 맡아 관현(운현궁)으로 가 이명복에게 언문교서를 전달했다. 이명복은 곧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이 되었다. 흥선군에게 첫째 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열두 살 난 둘째 아들을 고른 것은 왕권을 농단한 척신들을 혁파하기 위한 섭정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흥선군은 곧 대원군이 되었다.

국제정세는 유럽을 위시해 선진지역에서 민주주의 혁명, 민족국가 형성, 자유주의 개혁이 잇따라 일어났다. 조선은 나라밖에서 밀려오는 ‘쓰나미’의 물결을 읽지 못했다. 쇠똥구리처럼 국제정세에 깜깜한 유가들이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보고 염통 곪는 줄 몰랐다. 조선왕실의 판세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솥 속의 개미라고 할까. 자유주의 개혁이란 괴상한 이름의 불길이 멀리서 솥을 달구러 오고 있음에도, 그간 생선은 안동 김씨가 먹고 왕실은 비린내만 맡아온 사실에 더 격분해 있었다. 솥이 뜨거워지면 솥 속의 개미 꼴이 어떨까. 근시안이어서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제자리만 뱅뱅 돌겠지….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중간에 우뚝 솟은 산이 장안산이다.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자락에 죽림촌이 있다. 밀양 손씨를 아내로 맞은 백남현이 죽림촌에서 살았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눈썹이 하얀 고승이 찾아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온 ‘석가여래의 한 생각’이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하면서 조선조에 들어와 ‘실상무상 비밀의 법(dhrma)’이 실낱처럼 가늘가늘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집에서 지혜의 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깨달음을 열어 후세에 이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똑같은 꿈을 백남현만 아니라 손 씨도 꾸었다.

고종 원년(1864) 5월 8일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건강했고, 어머니나 아버지를 조금도 번거롭게 한 적이 없었다. 백남현은 아이의 이름을 형철이라 부르다 곧 상규로 바꿔주었다. 어릴 때 아버지한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울 때는 사고와 감정이 합리적 기능을 보인 착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아버지 백남현을 따라 장안산과 백운산 사이를 흐르는 백운천으로 고기를 잡으러갔다. 아버지가 고기를 낚아 살림망에 넣자, 고기가 하얀 배를 물위에 내놓고 뻐끔뻐끔 물을 마셨다. 저러다 죽으면 어쩌지? 짠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살며시 꺼내 도로 물에 놓아주었다. 아이의 주관적인 이 태도는 아버지 입장에서 착한 아이가 아니라 아버지 말을 안 듣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보였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어 백남현이 집으로 가려고 살림망을 들어보니 빈 망태기였다.

햐, 요놈 봐라! 눈을 부릅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고기를 다 어디에 감췄느냐?”

“그냥 살려주었어요.”

이런 못된 놈, 종아리를 때려주려고 회초리를 찾았다.

“살림망 고기가 살려달라고 애원해 놓아주었어요.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회초리를 찾던 백남현은 그 말에 예사 아이가 아니다 싶어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봄이었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 산으로 나물을 캐러갔다. 엄마가 고사리를 꺾자 손목을 꼭 잡았다.

“엄마 꺾지 마.”

손 씨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고사리가 물을 흘리잖아. 거 봐! 고사리에서 피가 나.”

손 씨는 나물 캐는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품안에 있을 땐 여느 아이처럼 사고와 감정이 합리적 기능을 보이더니 여섯 살 무렵부터 감각과 직관이 평형유형으로 바뀌었다. 이것을 ‘내향적 직관형’이라 하는데, 직관기능이 객체가 아닌 내적세계로 향해져 있었다. 

어쨌든 아이는 난세에 태어났다. 난세란 정치가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을 말한다. 백성들이 느끼는 왕실 이데올로기는 봉건착취로 사회적 모순이 전면화 되어 나라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나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가진 꿈에 무질서가 활개를 치는데…. 이런 난세에 상규는 서당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서당을 찾아온 낯선 서생이 시를 읊었다.

聞有胡僧在太白 蘭若去天三百尺

此僧年紀那得知 手種靑松今十圍.

천축국 수행자가 새벽별에 계신다고 들었지

그 분이 계신 절은 하늘을 300유순(yojana) 가야 있다.

이 수행자가 언제 태어났는지 햇수는 알 수 없고

손수 심은 푸른 소나무가 지금 열 아름이 넘는다.

상규는 머릿속이 번쩍했다. 밝음을 알려면 어둠이 있음을 알고 그 어둠을 벗어나야 한다. 의식이 내향적인 데 더 가까운 상규의 직관과 감각이 평형유형으로 새롭게 뻗어나갔다. 그것은 <천자문> <동몽선습> …, <논어> <맹자> …, <시경> <서경> …, <예기> <춘추>로 이어져 수직으로 쌓아올린 지식의 사고로는 감을 잡을 수 없는 시구였다. 상규는 하늘과 땅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天瑞)의 열자의 설명이 생각났다. ‘하늘이 덮기는 하나 싣지 못하고, 땅이 싣기는 하나 덮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인으로 받드는 공  맹은 어떤가. 열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들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우주의 삼라만상 역시 효용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상규는 골똘해지기 시작했다. 무한히 넓은 하늘이라는 빈 공간을 향해 감각과 직관이 쭉쭉 뻗어나갔다. 회남자는 ‘무한하고 형태 없는 혼돈 같은 데서 하늘과 땅이 생겨나 질서를 이루어 역학적으로 기본적 물질의 양(質量)이 생겼고, 그 가운데 두 개의 상반된 음과 양이 만물을 생성한다’고 말했다.

상규는 그것을 꼭 집어내 ‘아! 그렇구나’ 하고 마침표를 찍을 요량이 없었다. 마침표를 찍기에는 무엇엔가 스스로 속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속박은 난 이게 좋아, 저건 싫어, 아니야,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아니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이게 직관을 가로막고 있어서 순수한 주의집중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훈장님이 서당 학동들을 불러들였다.

“시를 한 수씩 지어 오너라!”

“시제가 무엇입니까?”

한 학동이 물었다.

“합죽선(合竹扇)이다.”

학동들이 마루로, 마당으로 나가 먼 하늘을 보면서 시상을 다듬느라 서있기도 하고 더러 달팽이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아이도 있었다. 상규는 순수한 주의집중을 해보려고 골몰해왔던 터라 생각이 얼른 떠올랐다. 그래서 붓을 들었다.

大撓合竹扇 

借來洞庭風

합죽선을 훨훨 부치니

동정호수의 바람을 몰아오는구나.

훈장님이 상규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합죽선도 부채니까 훨훨 부치면 물론 바람이 일어난다. 그런데 청나라에 있는 동정호 바람을 몰고 온다는 구절은 보통 아이로서 상상을 뛰어넘는 발상이었다. 동정호 700리 당나귀를 타고 간다하면 말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시라고 해도 합죽선과 동정호는 아무 관련이 없는 호수의 이름이고 합죽선은 한갓 사물의 이름일 뿐이었다. 한데 바람이란 것이 교묘하게 서로를 연결시켜준 시적 발상은 아무나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남다른 머리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시적 이미지랄까.

상규는 그 뒤로도 직관적이고 감정이 매우 섬세한 즉흥시를 곧장 읊었다. 한 번은 여자아이가 꽃을 꺾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꽃을 꺾어 손에 드니, 마음속의 춘정이 꿈틀거리는구나.’ 상규는 그 무렵 육체적 정신적 인지의 변화(puberty)가 시작된 때였다. 

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불교신문3266호/2017년1월18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