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아침이면 법복을 갖춰 입고 총총걸음으로 와 다기물을 올리고 부처님께 제일 먼저 새배를 드리던 노보살이 있다. 누가 물어도 위풍당당하게 “나는 불자요” 말하며 항상 <금강경>을 독송했다. 지난 동지 때 내 손을 붙잡고 “저는 다음생 동진출가 할랍니다” 맹세하듯 말씀하시더니, 이튿날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놓고는 식곤증으로 잠시 주무시는가 싶었는데 그 길로 꿈을 꾸듯 가신 것이다. 평소 깔끔한 성품이라 자식들에게 며칠 앓는 것조차 보여주기 싫으셨던지 그렇게 80평생을 단정히 갈무리하고 떠나셨다.

마치 허허롭고 광활한 겨울 들녘처럼 노보살도 한 생의 가을걷이를 마치신 듯 말이다. 가족들에게 일찍이 장례절차를 하나하나 일러두신지라 우왕좌왕하지 않고 차분히 진행되는 것을 보니 노보살의 행적이 더욱 여법하게 느껴졌다. “울 어머니 평생을 부처님 의지하시더니…그래도 다만 며칠이라도….” 자식들은 영전을 향하여 오열했다.

젊은날을 함께했던 백발 도반들은 광목 동방아 손질해 입고서 영전에 헌다하며 일어날 줄을 모른다. “나도 고생 안하고 저래 가야 할낀데…. 여보시오 도반님 곧 데리러 오시오.” 염불처럼 자꾸만 되뇌셨다. 갓 시집온 새댁시절 가난하고 서러운 삶의 구비마다 부처님은 친정어머니였고 남편이었고 스승이었다. 그런 부처님곁에 노보살은 다시 돌아와 저토록 초연히 웃고 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사진을 보니 무상한 세월이 법당 문풍지에 스미는 바람인 듯 파르르 떨린다.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자식들 애 안 먹이고 단잠 자듯 편안히 가게 해 주세요.” 어쩌면 당신의 언약처럼 그리도 홀연히 가셨는지.

얼마 전 지인의 중학생 아들이 전화를 해서는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책에 보니 큰스님들은 가실 날을 미리 알고 곡기를 끊고 위를 비운 채 입적하셨다면서요. 스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수행자는 어떤 모습으로 떠나야 할까,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답을 내 놓으라 세월은 재촉하고 있는데 추상같은 질문에 정신이 번쩍 났다. 바야흐로 한 생을 보낸 노보살은 편안히 눈감고 단잠을 취하는데 오늘밤 나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갈대처럼 자욱한 생각만이 무성하다.

[불교신문3266호/2017년1월18일자] 

일광스님 거창 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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