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 인생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신심 깊은 어머니 영향
불자로서 자긍심 높아
30년 ‘가정부’ 역 딛고 
이제는 ‘국민배우’ 반열

“부처님 가피로 지금의
전원주가 있습니다 …
여러분들도 좋은 일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금산 보석사에서 만난 국민배우 전원주 씨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다.

30년간 가정부 전문 배우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탤런트 전원주.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하지만 모친부터 이어진 깊은 신심과 연기에 대한 사랑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묵묵히 외길을 걸었다. 참고 기다리며 정상에 오른 그는 올해로 연예인 생활 55년을 맞이하며 국민배우로 자리매김 했다. 전원주 씨를 지난 12월 중순 금산 보석사에서 만났다. 

“어머니가 무척 엄하셨습니다. 사내대장부와 다름없었지요.” 그의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모친이었다. 해방 무렵 북한에서 내려와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는 불심(佛心) 또한 깊었다. 노점을 하다 동대문시장에 상가 하나를 마련한 어머니는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절에 다녔다. 

전원주 씨는 “아무리 장사 때문에 바빠도 매월 초사흘 새벽에는 꼭 절에 가서 기도하셨다”면서 “그 때마다 어머니가 잠자는 나를 깨워 함께 절에 가자고 해서 어린 마음에 서운했었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 어머니가 <천수경>을 외우라고 하셨던 일도 눈에 선합니다. 제대로 외지 못하면 크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왜 그리 서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모친은 사찰 신도회장을 지낼 만큼 신심이 남달랐다. 의지할 곳 없는 남한에서 살아남으려면 왕성한 생활력과 부처님이라는 의지처가 있어야 했다. 전원주 씨는 그같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치열한 방송계에서 살아남아,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부처님께 절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하기만 하다. 

“너, 부처님께 절해 봐라. 안되는 게 없어. 너 커서 봐라. 부처님 가피를 받을 것이다.”

엄격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소녀 전원주’의 넘치는 끼는 막을 수 없었다. 전교에서 등수가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 했지만, 남들 앞에서 마음껏 연기를 펼치고 싶은 생각을 꺾지는 못했다. 아마 인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혼날 때도 한 번에 잘못했다고 빌지 않고, 어머니 얼굴을 빤히 쳐다봤어요. 그러면 반항한다고 한대 더 맞는데, 사실은 반항한 것이 아니고, 화날 때 표정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기가 하고 싶어서, 울 때도 거울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철부지 같은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연예계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어머니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의 뜻대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국어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끼가 어디 가겠는가.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간 연예계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시밭길이었다. 전원주 씨는 “지금 탤런트로 등록된 이들이 1980명 정도 되는데,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면서 “처음 연기자 생활을 할 때도 공부도 많이 하고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늘 돌아오는 배역은 가정부였다”고 회고했다. “사실 어린 마음에 많이 속상했습니다. 제가 생긴 것도 그렇고, 어머니 밑에서 부엌 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연출자들 사이에서 ‘전원주 식순이 시켜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때는 왜 그리 서러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냥 가정부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밥상 들고 애까지 걸머져야 하는데, 재수 좋은 날은 가벼운 애가 오고, 그렇지 않은 날을 무거운 애가 왔습니다. 하하.” 

번듯한 배역을 맡지 못해 속상한 마음에 사찰을 찾아 대웅전에서 절을 올린 후 엎드려 울며 하소연 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부처님께 빌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는데, 부처님 저에게는 왜 좋은 일이 생기지 않나요. 좋은 일이 생기게 해 주세요.” 그렇게 가정부 전문 배우 생활을 한 세월이 30여년. 어려울 때 낙심한 그를 따뜻하게 배려해준 동료는 불자였던 여운계였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그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연출자에게 혼이 나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내지도 못하고 남몰래 울 때 여운계가 뒤에서 끌어안으며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참아라’ 하면서 ‘나도 옛날에 밑바닥 생활을 했는데, 기다려봐라, 너도 좋은 날이 올거다’라고 위로 해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연기자로서 가장 기쁠 때는 국민과 시청자가 ‘알아봐 줄 때’다. 길을 지나가는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거나, 아니면 빤히 쳐다보기는 하지만 “저 사람을 어디서 봤지”라는 표정을 지으면 그 만큼 서럽고 속상한 일이 없다. 그가 가장 어려워하는 어머니에게 동네 아주머니가 “이봐, 원주가 텔레비전에 나왔어. 그런데 앞치마 두르고 잠깐 나왔는데, 내가 물 한잔 마시고 보니 벌써 꺼졌어”라며 약 올리기도 했다. 

억장이 무너진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렇다고 시청자들에게 사랑받는 배우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럴수록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또한 사찰을 찾아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기도하고 의지하며 원력을 세웠다.

국민배우 전원주가 되기까지에는 그가 세운 철칙이자 원칙이 있다. ‘참아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거치며 전원주는 등산의 원칙과 날씨의 원칙을 터득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의 철학이다. 

“등산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비탈길이 나오고, 나중에는 좀 더 경사가 급한 길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주저앉지 않아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호흡을 조절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노력하고 참아야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전원주 씨는 “우리 불자들도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인생이 늘 잘 되고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다”면서 “힘들고 속상하고 슬프고 괴로울 때 이것을 잘 개척해 나가는 것이 등산의 원칙이며, 결국 부처님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터득한 ‘날씨의 법칙’에 대해서도 말문을 열었다. “힘들고 어려우면 내 마음에 폭풍이 치는구나. 괴롭고 슬프면 내 가슴에 비가 오고 있구나. 비를 피하고 폭풍우가 지나면 나에게도 언젠가는 ‘쨍하고 해뜰날’이 올 것이다.” 

전원주 씨는 “노력하고 기다리면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해뜰날이 있다”면서 “부엌데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채찍질하는 구나, 참고 용기를 내어보자’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무명의 연기자로 생활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시장에서 우연히 들은 아주머니 웃음소리에 착안해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것이다. 시장 아주머니가 그날 물건을 모두 팔아 ‘떨이’를 잘했다면서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는 한 달간 연습한 끝에 연출자의 눈에 들면서 새로운 연기인생이 시작됐다. 

그렇게 맡은 배역이 1990년 9월9일 첫 방송을 시작한 농촌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시골 아낙이었다. “그 드라마가 저를 살렸습니다. 7년8개월간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제대로 알렸죠.”

인기가 올라가면서 영화도 여러 편 출연했다. 1998년에는 002 국제전화 광고로 ‘전원주’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국제전화 광고는 그해 대박을 치면서 경쟁 작품이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광고대상을 거머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그의 인기는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국민배우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부처님 가피로 지금의 전원주가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도 불사를 많이 하고 좋은 일 하며서, 자랑스럽게 불자라는 것을 나타내길 바랍니다. 늘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 전원주 씨가 걸어온 길 …

1939년 8월8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3년 동아방송(DBC) 1기 공채 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1972년 동양방송(TBC) 탤런트로 특채되어 각종 드라마에서 활약했다. 특히 1990년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비롯해 SBS <퀸> <토마토> <대박가족>, KBS <학교3>, MBC <타임머신> 등 주요 방송사 작품에서 풍부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또한 1974년 <별들의 고향>을 비롯해 <너는 내 운명>, <흑수선>, <저 하늘에도 슬픔이>, <황산벌>, <어린 신부> 등 영화에서도 열연했다. 이와함께 각종 CF에 출연하는 등 영역을 넓혔다. 신심 깊은 불자로 모범적인 신행생활을 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지구촌공생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법명은 대원성. 

[불교신문3265호/2017년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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