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자는 달랠 줄 알면서 마음 고칠 줄 모르다니…

행동과 지혜를 갖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타가 함께 이로운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아

백년도 잠깐이라 했는데

어찌 佛法 배우지 않고

그저 놀고 있을 것인가

늘 부지런히 참선 수행을 하라고 당부하던 성수스님은 미수(米壽)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2010년 12월말 인터뷰 당시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天視萬象 黙無言

大地回轉 次不動

하늘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을 보아도 분별냄이 없고 대지(大地)는 쉼 없이 돌고 돌아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우리 범부(凡夫)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근거 없는 말들로 시시비비를 그칠 줄 모르니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뜻있게 산다고 하겠는가? 옛말에 대인은 자기 걱정에 여념이 없고 소인배는 남의 일만 걱정한다 했으니 우리 인간들이 인체기능을 잘 활용하면 군자에서 성현 부처까지 그 인격을 이룰 것이요, 잘못 악용하면 인간다운 인간은 물론이고 보잘 것 없는 금수나 미충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잘 것 없는 인품에 그칠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 중 상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기 때문인데 그 하는 말이나 행이 진실성이 없고 아집(我執)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허위와 기만으로 행이 뒤따를 수 없는 말은 숭고한 빛을 잃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육화(六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데 즉 눈은 사물을 보되 바로보고 정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요. 소리를 듣는 귀 역시 남의 말을 잘 듣고 선의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나쁜 말 불미스런 얘기는 스스로 소화해서 밖으로 표현할 때 부드럽고 조용히 덕을 이룰 수 있어야 귀의 기능을 다함이며 코와 입은 우리 생명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마치 숨 한번 잘못 쉬어도 한 세계 즉 소우주가 무너질 뿐 아니라 입 한 번 잘못 떼어 대사를 그르침이 고금에 한 둘이 아님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국주가 망발(妄發)을 서슴지 않는다면 국운이 위태로울 것이요 한 가장의 실언(失言)은 패가망신을 초래할 것이며 이렇듯 입은 재해의 근원이며 문이라 했으니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며 신행(身行)은 후학이 본받을 수 있는 위의가 있어야 함이니, 성인의 말씀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짐승은 화살의 화가 뒤 따르고 날기를 좋아하는 새는 그물의 재앙을 면키 어렵다 했으니 사람이 행을 가짐에 어찌 쉽게 생각하겠는가.

사람의 인격의 척도가 언행에 있으니 마치 몸가짐이 단정하고 말은 무게와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을 형성함에도 신체기능이 조화를 유지해야 하며 하나라도 어긋나면 곧 균형을 잃고 스스로가 하나의 지옥을 만들고 그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발전함에도 중신의 화합이 있어야 하고 한 가정의 융창도 가정이 화목해야 하며 한 단체의 운명도 화합이 절대의 근본입니다. 승가란 화합이란 말이며 부처님도 화합을 극구 칭찬하신 것입니다. 유교가 사서삼경이 없고 논리 도덕관이 희박해서 망한 것이 아니며 불교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적어서 전법포교(傳法布敎)가 안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화합하고 몸소 수행하고 열심히 전법하여 불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한다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 제756호(1978년 9월3일자)에 실린 성수스님 법문.

平生修心 不和道

後世誰稱 大道師

수도를 한다는 것은 발심이 첫째입니다. 발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를 닦겠는가. 도는 왜 닦는지 또 누굴 위해서 무엇 때문에 수도하는지 조차 잊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는 익혀서 연습하는 것이 아니고 생사장야(生死長夜)에 꿈을 깨느냐, 못 깨느냐 하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해결문제입니다. 진정한 발심을 했다면 주저할 것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옮기기 전에 해결한 후 걸음을 옮겨야지 도를 모르고 걷는 걸음 밑에는 사지(死地)만 오로지 기다릴 뿐이라 어디로 옮겨 놓을지 막연합니다.

발심은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생명은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착각해서 영원히 존재할 줄 알고, 설사 죽음의 사자가 언젠가 온다는 숙명적 이치는 알면서도 탐진(貪嗔)의 속박에 얽혀 실제의 생사가 고(苦)임을 실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업을 짓는 것입니다.

생사가 고(苦)인줄 분명히 알아서 일초 일분도 늦추지 말고 용기와 분심(忿心)으로 수미산을 뛰어 넘은 후에 비로소 도의 맛을 조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발심이 중요한 동시에 어떻게 닦느냐의 방법도 매우 중요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목수에게 배우고 글은 학자에게 배우듯이 도를 닦으려면 우선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근기(根器)에 따라 화두를 받고 언하에 개오해서 생사 밖의 도리를 얻어 보면 49년의 광장설인 부처님 교칙(敎則)이 자기 손바닥 위에 있고 불조(佛祖)가 눈 안에 있어 사자후(獅子吼)를 토(吐)하게 될 것입니다.

도를 깨닫기도 어렵지만 선지식을 만나기 더욱 어려우니 수도자는 명안종사 만나기를 서원으로 세워서 차근차근 첫 걸음부터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며, 급히 먹는 밥이 체하고 계단을 건너뛰면 구르기 쉽듯이 수도인의 가장 큰 병도 도를 쉽게 얻으려는 것이니 진정한 생사해탈의 도리를 알려면 천만리 멀다 말고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서 53선지식을 친견한 선재동자의 변할 줄 모르는 대신심(大信心)을 교훈받아야 합니다.

요즘 간혹 발심 없이 자비문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뜻 없는 삶에 의미 없이 받은 화두가 자다 먹는 떡과 같아 아무 맛을 모르고 세월만 보내니 행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敎)나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킨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니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붙들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 그릇 비우고 와서 나의 법 배우라 하셨고 과거의 모든 선지식들이 쉬어가라 했으며 끝없는 세월동안 익혀온 나쁜 버릇 고치면 된다 하였으니 우리도 나쁜 업을 고치면 될 것입니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부처님이 변함없는 즐거움을 얻은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욕심을 버리고 어려운 일만 하신 결과며 중생들이 화탕지옥에 오가는 것은 수없는 세상에 탐욕(貪慾)을 못 내린 탓이다. 누구도 막지 않는 천당에 가는 이가 적은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욕심을 버리고 어려운 탐진치의 세 가지 번뇌를 자기 재물로 알기 때문이며 권하지 않는 지옥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네 가지 욕심 사대색신(四大色身)과 다섯 가지 허망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자기의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그 누구인들 도 닦을 생각이 없을까마는 저마다 그렇지 못함은 애욕(愛慾)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비록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는 못해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수행을 버리지 말라. 세상의 오욕락을 다 버리면 성현처럼 공경받을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과 같이 존경받을 것이다.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악마(惡魔)의 권속이 되고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법왕의 아들이 된다. 푸른 산 깊은 골에는 수행인이 사는 곳이요, 높은 산 좋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닦아야 할 곳이다.

주린 배는 나무열매로 달래주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로 쉬게 할지어다. 좋은 음식만 먹어봐도 이 몸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요, 비단으로 감싸 주어도 목숨은 기어코 끊어지고 마는 것.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念佛堂)을 삼고 슬피 우는 기러기로 벗을 삼으며 예를 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시려도 불을 생각지 않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도 먹을 생각할 사이 없이 닦아도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않고 놀기만 하겠느냐!

지혜와 덕이 많아도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가엾은 생각을 내시고 설사 도행(道行)이 적더라도 산속에 사는 이를 성현들은 기쁘게 여기신다. 재주와 학문이 많아도 계행이 없으면 보배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가지 않는 것과 같고 수행은 부지런히 해도 지혜가 없는 이는 동(東)으로 가려 애써도 서(西)로 가게 되는 것과 같다. 현명한 이의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고 어리석은 이의 하는 짓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상통한다.

사람마다 주린 창자를 밥으로 달랠 줄은 알아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르누나. 행동과 지혜의 갖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와 남이 함께 이로운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 성수스님은…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4년 양산 내원사에서 성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48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후, 제방선원에서 수선 안거했다. 성철, 청담스님 등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 동참해 한국불교의 사상적 중흥을 이끌었고, 조계사, 해인사, 범어사, 고운사 주지 등 교구본사 주지를 역임하며 종단 행정 안정에도 힘썼다. 특히 1981년 제18대 총무원장으로서 10ㆍ27법난 이후 혼란에 빠진 종단을 수습하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선지식으로 손꼽히며 1994년과 2007년 원로의원으로 잇따라 추대돼 최고령 원로의원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2005년에는 전계대화상으로 위촉됐으며, 조계종의 선(禪)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서울과 함양, 산청 등 전국 곳곳에 선원을 개원하고 출ㆍ재가를 가리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며 수행을 통한 행복을 일깨웠다.

2012년 4월15일 오전6시경 영축총림 통도사 관음암에서 법랍 69년, 세수 90세로 원적에 들었다.

[불교신문3265호/2017년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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