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사랑하라”

지난 12월7일 봉암사에서 만난 적명스님. 동안거를 맞아 정진하고 있는 스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밀고 나간다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화제는 현직 대통령이 연루된 초대형 비리로 시작했다. 희대의 국정농단 의혹은 동안거 결제 전에 터진 일이다. 일 없이 한가한 ‘무사한도인(無事閑道人)’의 삶이지만, 그래도 들을 귀가 있어 자꾸만 마음이 성가시다. 스님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황망하다”며 국민의 공통된 감정을 털어놨다. 어떻게 한 나라의 운영시스템이 이토록 처참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절망하고 분노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사각활(大死却活, 크게 죽어야 도리어 산다)’이다. 스님은 “철저한 각성과 변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역행(逆行) 보살’로 역사에 기록돼야 한다. “매주 계속되는 촛불시위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정의롭고 지혜로운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소득의 양극화, 권위주의, 부정부패, 반칙과 ‘갑질’ 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적폐를 뿌리뽑는 선연(善緣)으로 회향되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대선을 언제 치를지는 오리무중이나 금년에 치를 것은 확실하다. 올해엔 종단 내에서도 대통령에 필적하는 지도자를 선출한다. 적명스님은 대중공의 전통을 실현한다는 취지에서 총무원장 직선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도덕성, 행정능력, 교리에 대한 안목, 두터운 신망… 총무원장 스님에게 요구되는 최우선의 덕목에 대해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짤막했다. “총무원장에 출마하겠다고 마음먹은 스님들이 가장 잘 아실 것이다.” 사판(事判)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안거 중 스님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다. 오전과 오후 대중과 함께 정진하는 동시에 틈틈이 소참(小參) 법문으로 정진을 독려한다. “자기 수행은 자기가 하는 것이니 별다른 참견은 하지 않는다”는 게 지론이다. 적명스님은 출가 후 50여 년간 오직 참선으로 일관해온 도인이다. 자유자재로 삼매(三昧)에 든다. 자부심도 세월의 크기에 걸맞다. ‘안거는 말 없는 포교라고들 한다’고 운을 떼자 “말 없는 포교를 넘어 포교의 뿌리”라는 확언이 돌아왔다. 

70년 전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며 투철한 계행과 수행으로 삶을 밀어붙인 ‘봉암사 결사’가 분명한 증거다. “혹자들은 산중에 틀어박혀 있지만 말고 나와서 포교를 하라는데, 대체 무얼 가지고 포교를 한다는 말인가요? 깨달아서 지혜를 갖춰야만 진정한 포교를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목숨을 걸고 도를 닦는 스님들이 아직 있기에 한국불교가 대중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면 왠지 ‘고행’의 느낌이 든다. 가부좌는 불편해하고 화두는 어려워한다. 하지만 스님은 단호했다. “행복하자고, 영원히 행복하자고 수행하는 것이다.” 오랜 수행의 결실이 궁금했다. 지극히 고요한 마음의 경지를 뜻하는 ‘삼매’는 산스크리트 ‘사마띠(samadhi)’의 음차(音借)다. 소리만 빌려왔다는 것인데 뜻으로도 통한다.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의식세계는 딱 두 개뿐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온갖 분별망상을 벌이거나, 잠들어 의식활동이 멈추거나. 삼매는 깨어있기는 한데 아무런 잡념이 들지 않는 신기한 상태죠.” 삼매란 ‘제3의 의식’이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면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해탈했다는 각성으로만 꽉 찬 이것이 ‘참나’요 본래면목이다. “삼매를 30분만 지속할 수 있어도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희열감이 넘칩니다. 누가 칭찬해준 것도 아닌데, 값비싼 자동차를 선물 받거나 번듯한 집을 장만한 것도 아닌데 마냥 즐거워요. 결국 행복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걸 절감할 수 있어요. 진실로, 내가 부처입니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화두를 들어보세요. 힘이 쌓이면 기쁨이 쌓입니다.” 

본론이 늦었다. 본지의 신년특집호 주제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으로 정해졌다. 전설적인 종장(宗匠)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의 명언은 ‘어디서나 주인 된 자세로 살면 그곳이 진리의 경지’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선뜻 이해가 되면서도 공감하긴 자못 어려운 말이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이전에도 국민들의 삶은 힘겨웠고 막막했다. 주인? 대부분 비천하고 처절한 을(乙)의 삶이다. 적명스님은 “나의 이름이나 몸뚱이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나로 받아들여야 빛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수의 과학자들에게서 검증된 진리라 해도, 내 마음이 그걸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를 통해야만 비로소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귀중하고 절대적인 게 바로 나입니다.” 더 나아가 마음이 곧 현실이다. 나를 사랑하려면 내가 처한 현실을 사랑해야 한다. 스님은 ‘기꺼운 받아들임’으로 요약했다. “죽도록 힘들다고 해서 삶을 절대 포기해선 안 됩니다. 끊으려해도 끊어지지도 않아요. 업장(業障) 때문에 결국은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해야 합니다.” 쉬고 싶다면, 이기지 말자. “상대방이 지독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고 말 한 마디부터 따뜻하게 해보세요. 내가 착해지면 그도 착해집니다.”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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