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에 대한 인식은 설 곳을 잃은 상실인 동시에 진정한 자아 회복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이 인식이 상실인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질료가 무(無)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기에 인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다. 대개 인간은 이를 근거로 허무를 그저 감정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며 애써 부정하려 한다. 윤후명의 연작 장편소설 <둔황의 사랑> 속 인물도 그러하다. 그는 이 허무를 알기도 전에 체험한 ‘조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것을 느낄 뿐, 자신이 느끼는 허무감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또한 나름대로 배웠다는 의식이 강한 인물이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허무감을 조소(嘲笑)하는 ‘미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절대성, 혹은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존재의 고향(故鄕)같은 것이라면, 이러한 인물 설정은 적절했던 것 같다. 기나 긴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정신적으로 조숙하여 다소 오만하면서도 너무도 순수해서 상처를 타고난 소년과 같은 이만큼 적절한 인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형적이다. 연작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 말은 내러티브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일단은 주인공의 내면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이 수렴이 그가 느끼는 허무, 즉 ‘0’에만 멈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이 찾아낸 ‘허무의 본질’은 무엇일까. 각각 다른 사랑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그의 여정은 마치 탑을 쌓기 위한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즉, 이 관념의 여정은 황막(荒漠)한 실크로드의 평원을 배경으로 하지만, 매순간 획득되는 반성과 깨달음의 자취는 상승적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계단을 쉬이 오르지는 못한다. 애초에 이 여정은 허무를 계기로 한 것이기에 구체적인 목적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이 여정은 고독한 영혼의 향수(鄕愁)에서 비롯된, 가본 적 없는 고향으로의 ‘회귀(回歸)’이다. 

그가 오르는 계단 하나하나에 작가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랑은 차가운 허무의식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온도를 느끼는 삶의 이미지이다. 

“그 무렵, 나는 여전히 그놈의 쇠침대에서 잠이 깼다. 낡았지만 언제나 꿈 없이 잠들 수 있는 침대였다…(중략)…그리고 유난히도 추운 그해 겨울이었지만 그놈의 좁은 쇠침대에 둘이서 껴 붙어 난 결과. 냉돌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냉기를 피하는 데는 그보다 더 안성맞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방비를 안 들였으면서도 아침에 침대 속에서 나올 때면 뒤에 남아 있는 온기가 식는 것이 마치 전기계량기가 거저 돌아가는 것처럼 아까웠다(<둔황의 사랑>, pp.21˜22, 2016, 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쇠침대”, “겨울”, “냉돌” 등으로 환기되는 이미지는 차가움이다. 난방기가 돌아가지 않는 냉방에서 보내는 “유난히 추운” 혹독한 겨울은 심장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잘 곳으로 선택한 것은 “쇠침대”이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낡았지만 언제나 꿈 없이 잠들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비록 덤덤한 어조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곧 그는 아직 꿈을 꾸는 청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꿈이란, 그와 같이 의기양양하고 자의식이 강한 존재에게 있어서는 어떤 본질 혹은 절대성일 것이다. 그는 원한다. 무언가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줄 수 있기를, 그리고 이 설명을 통해 자신의 삶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설명의 수행자는 분명 어떤 절대적인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지지부진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는 그러한 절대성이 결코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이 곧 그가 가지고 있는 허무감의 본질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꿈 없이 잠들 수 있기”를 원한다. 이는 오만하지만 순수한 소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조소이자, 스스로에게 행하는 ‘형벌’이지만, 중심 없는 삶 속에서도 이를 고집스럽게 지켜간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구도(求道)’일지도 모른다. 즉, 그는 여전히 ‘희망’을 꿈꾼다. 

한 겨울에 냉천에서 수행을 하는 수도승처럼 차가움을 거부하지 않지만 그의 이 행위는 아직은 ‘고집’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차가움을 격렬히 느끼며 따뜻함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 수행에는 언제나 ‘여인’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사랑’은 그의 허무를 잠시나마 녹여주는 온돌이며, 외로운 그의 영혼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언제나 일시적이다.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주는 친구의 우정을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위가 ‘우정’이라는 말로 구체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녀석이 드러내놓고 우정, 우정 하는 데는 메스꺼움이 뒤따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p.30).”) 그의 마음은 아직은 비열(比熱)이 높은 돌처럼 완고하며 그렇기에 공허하다. 

춥고 허무한 그에게 있어 사랑은 어떤 절대성의 그림자이다. 그것은 그가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고 믿는 존재의 근원이다. 일시적이더라도 살갗이 맞닿을 때의 따뜻함이 주는 익애(溺愛)의 느낌은 분명 근원적인 무엇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자신의 삶의 이유를 회의하는 그에게 있어 여인과의 사랑은 그가 머물 수 있는 일시적인 집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느끼는 결핍과 그에 따른 허전함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어쩌면 그가 구태여 “쇠침대”를 그 시절 자신의 곁에 있던 ‘어떤’ 그녀와 함께 잘 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그는 여전히 오만하게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사랑’이 그를 선택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리석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그것의 심연 속으로 파고들어야만 한다. 작가는 이를 일종의 ‘자아 찾기’와 같은 것으로 형상화한다. 주인공이 보이는 편력적인 사랑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가 한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절대성은 허무감에 침식당하지 않는 ‘진짜 자신’이었다. ‘사랑=절대성=진정한 나’, 이 삼위일체의 공식은 그의 안에서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담지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이 명제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그에게 찾아온다. 술자리에서 대학동기가 시시덕거리듯이 건넨 둔황의 에피소드, 때마침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이념 투쟁에 지쳐 서역으로 떠난 아버지가 남긴 기록 등, 신기할 정도로 결정적인 계기들이 찾아온다. 마치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 주어진 전형적인 내러티브처럼 이 계기들은 너무도 우연적이다. 

이 같은 클리셰(cliche)들의 우연성은 서사로서는 이 소설의 한계이지만, 방황하는 한 연약한 인간이 탐구하는 여정이라는 주제적 맥락 하에서는 의미의 표출을 위한 의도된 구조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연성(형이상학적 실체, 절대성, atman)을 희구하고, 이를 위한 필연적인 공리(위 단락에 제시된 동어반복적 명제)를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은 얻게 되는 계기와 일련의 과정은 우연적인 발견과 만남이라는 ‘인연(因緣)’의 연속이다. 그리고 필연과 우연의 공존이라는 이 현상적인 모순은 기나 긴 여정을 통해 주인공의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의 역설이 되고, 나아가 변증적인 깨달음이 된다.

그에게 있어 절대성은 사랑의 이미지이다. 이를 좀 더 관념적으로 표현하면, 아트만(我,atman)이 곧 오온(五蘊,skandha)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만일 실체(atman)가 오온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생멸할 수밖에 없다’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이 외로운 청년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한 ‘필연적 계기’가 된다. 용수의 이 말은 그가 진리라 믿는 ‘절대성=자아=사랑’이라는 명제에 또 다른 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 그는 이 명제의 완성을 위해 자신만의 기나 긴 여행을 시작한다.

둔황으로의 여정을 떠나기 전 차가운 냉소로써 스스로를 무장한 그는 고독하다. 이냉치냉(以冷治冷)의 오기가 그를 지탱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뜨거운 알코올과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이 차가움을 끊임없이 해소하려 하는 가엾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가 애써 태연한 척 슬퍼하는 이 고독은 ‘차가운 허무의 고독’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관찰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는 주인공으로서 1인칭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좀처럼 솔직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의 상당수는 화두와 관련된 지식의 나열을 통한 변죽 울리기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애써 서늘함을 가장하지만, 그럼에도 이는 상처받은 영혼의 안쓰러운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결국에는 여러 계기들로 인해 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고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허무의 차가움을 벗어나고자 시도한 나름의 모든 노력들이 일시적인 아스피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그 허무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밖에는 없다.

마침내 ‘사막의 여자’라는 이름으로 떠난 서역으로의 여정 속에서 그가 깨달은 고독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여행을 통해 그가 허무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가. 그의 허무는 ‘유한함’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한한 존재는 무한함을 꿈꾸고 이것에 ‘실체’라는 존재론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그가 떠나는 이 여정의 애초 목적은 이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그 어떤 실체도 아니었다. 애초에 ‘발견’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 끊임없이 이어진 황막한 땅에는 발견할 만한 묵중한 무게의 이정표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그 위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들(<사막의 여자>, p.376)” 뿐이다. 그리고 그 사막 위, 별들 아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막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 둔황의 석굴사원으로부터 옛 벽화 세계가 재현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구도자가 되어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에서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본 적이 있는가.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끝없는 절대 속에서 별 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지구에 홀로 남아 우주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가장 멀리 가서 가장 머나먼 자기 자신을 본 적이 있는가(pp.376˜377, 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명사산 사막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다시 고독이다. 그가 알고자 했던 고독의 본질은 어떤 다른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그리고 끝없는 절대”이다. “지구에 홀로 남아 우주를 바라보는” 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그는 비로소 그토록 보고자 원해 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고독은 그가 겪어 온 이전의 고독과는 다르다. 이전의 고독이 ‘차가운 허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 고독은 ‘뜨거운 허무의 고독’이다. 이제 그는 이 끝없이 적막한 수평선 위에서 고양감을 맛본다. 고독한 허무의 심연을 찾아 그것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이 관념의 여정은 거꾸로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질(質)로서의 허무의 본질을 그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때의 허무감은 그의 피를 고양시키는 삶의 상승적인 이미지가 된다.

“나는 오랜 세월 헤매어온 내 삶을 절감했다. 진정한 사랑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현기증처럼 내 머리를 스쳤다. 그리하여, 나는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 폐허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한 그것은 폐허가 아니었다. 숭고하지만 뜻 모를 그 무엇이란 바로 기도를 통해서만이 밝혀지는 진리이리라.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리라.

(중략)

나는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끝없는 절대 속에서 태어나는 기도가 그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둔황, 모든 로우란을 거쳐, 그 찬란한 폐허를 거쳐, 하나의 탑을 내 존재 위에 세울 것이었다. 

어두운 사막으로 별빛이 내려와 알알이 박히고 있었다(pp.378˜379, 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어두운 사막”과 “폐허”는 자기 자신을 회의하여 삶의 근저(根底)를 잃고, “오랜 세월 헤매어온” 그의 삶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 역시 어두운 사막, 즉 자신의 실존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고독하고 여전히 허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지점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변모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기도”라고 명명한다.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그리고 끝없는 절대 속에서 피어나는 이 기도’는 주인공이 느끼는 허무의 질을 바꾸어 놓는다. 그의 삶을 폐허와 같은 사막으로 만들었던 허무는 이제 “하나의 탑”이 되고 ‘알알이 내려와 박히는 별빛’이 된다. 

그가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던 ‘기도’란 무엇일까. 기도의 이미지는 상승적이다. 그가 폐허와 같은 사막에서 하는 기도는 “깜깜한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별이 상징하는 의미는 전통적인 그것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신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 폐허 속에서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절대적인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별은 자신과 우주 이외에는 대면할 것이 전혀 없는 완전한 고독 속에서 그가 확인한 유일한 것, 즉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폐허와 같은 사막에 알알이 내려와 박히는 별빛’은 허무 속에서 확인한 자기 존재의 의미 있는 반짝임일 것이다. 

허무란 ‘없음’이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반쯤 내팽겨 두도록 만든 것은 이 허무에 대한 인식이며, 이 인식은 곧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음을 뜻한다. 결국 그를 서역으로 떠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곳과 관련된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근저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실체적 절대성에 대한 강한 신념은 결코 이러한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늘 좌절한 채로 냉소의 갑옷을 입고 살아왔다.

하지만 명사산의 적막한 사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는 그토록 바라왔던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때의 확인은 ‘완전한 없음’ 속에서 획득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윤후명이 말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확인’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 완전한 없음에서 획득된 자기 자신의 존재란 ‘공(空)’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직관은 그가 고수한 동어반복적 명제에서 결핍된 나머지 한 항에 할당되어, ‘절대성=자아=사랑=공(空)’의 완전한 귀결을 맺는다. 그가 이 여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떠났던 이유는 이 명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가 폐허 위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명제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체는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용수의 말은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알려준 지혜는 모든 오온의 실체는 없다(空)라는 것이었다. 이때의 오온(五蘊)이란, 물질적 현상(色), 감각(受), 표상(想), 의지(行), 판단(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존재를 규정하는 구성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오온과 같다는 것은 실체가 곧 인간의 경험과 인식 · 표상 · 판단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뜻한다. 하지만 실체가 이와 같이 ‘구성된 것’이라면 본래 절대적인 실체란 있을 수 없는 것, 즉 공(空)일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말대로, 절대적인 실체란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존재의 원인으로 삼는 것(causa sui)’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성되었음은 곧 다른 것에 의존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마지막 한 가지의 의문이 남는다. 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텅 빈 실체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말인가.

윤후명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보여준 지난한 여정을 통해 이를 소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청년이 지나간 길에 스치듯이 경험했던 사랑들이 바로 그것이다. 관념의 여정 속에서도 끊을 수 없었던 여인들과의 사랑은 그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항(項)에 방점을 찍을 수 있도록 해 준 경험적 깨달음들이었다. 즉, 그의 존재는 어떤 절대적인 실체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닌 부단하게 살아가는 여정과 그 속에서 얽히는 여러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비록 절대적인 존재의 원인은 텅 빈 하늘과 같이 공허하지만, 그 각각의 인연과 사랑들은 마치 막막한 사막을 그린 지도 위 좌표 상에서 돌들 사이의 방향과 거리가 서로의 상대적인 위치를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청년의 존재 역시 이러한 인연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무게와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사랑과 자아를 찾아 서역으로 길을 떠났던 청년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구성했던 명제의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 그가 자기 자신을 확인해줄 원인으로서 희구했던 어떤 절대적인 실체는 텅 비었지만, 늘 그가 갈구했던 사랑과 인연적 계기들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 확인의 순간에 그가 경험한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그리고 끝없는 절대”는 어쩌면 텅 빈 실체의 헤아릴 수 없는 무게와 넓이일지도 모른다.

<사막의 여자>의 결미 부분에서 이 청년은 지극한 자기 고양감을 맛본다. “어두운 사막으로 별빛이 내려와 알알이 박히고 있었다.”라는 말은 황폐했던 옛 자아가 다시 확인된 새로운 자아와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자아가 새롭게 확인된 것이 아닌 ‘다시 확인된’ 것인 이유는 그가 이미 그것을 삶을 통해서 희미하지만 부단히 확인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바로 그 고양(高揚)의 순간에 자신과 동행해 온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한국에서 둔황에 대한 소설을 썼다오. 돌아가면 보내주리다. 저 별 중의 하나에도 우리처럼 만난 사람들이 있겠지요(p.377, 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구성해 온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이 몇 마디의 말 속에는 자신과 화해하는 그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이제 그는 그가 오르고 있는 탑의 한 계단 위로 올라섰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사막과 같이 적막하고 폐허와 같이 황량하지만 그래도 총총히 별이 박힌 하늘이 있는 삶 속에서 그만의 탑을 쌓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 그 과정은 공허한 하늘을 향한 기도와도 같이 고독할 것이다. 하지만 묵묵히 쌓아가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탑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쌓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저 돌무더기일 뿐이다.

인간이 절대성을 희구하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고독 때문이다. 하지만 유한함과 불안전함은 오온의 본질이며, 이는 곧 인간의 본질이다. 무상함을 타고난 존재가 무상하지 않는 절대성에 집착을 하는 것은 고통만 낳을 뿐이다. 진정한 자기 회복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인정에의 과정을 고집스럽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이 읽은 만한 작품인 이유이다. 윤후명은 서로 대립되는 이미지들 사이의 긴장과 화해를 통해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은 그저 체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 인정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가능성의 조건은 내 자신의 해체를 통한 분열된 자아와의 회복과 화해이다. 

이 해체는 연기(緣起)에 대한 직관에 기반 한 것이다. 이 직관은 인간이 통시적인 관계성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사이의 부단한 반성과 화해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자아는 긍정적으로 불완전하기에 언제나 새롭다. 

김기영

 

방 민 호 / 서울대 교수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김 기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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