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향기로 오신 묘엄스님

배종훈 그림 이미령 감수 / 불광출판사

항상 자신의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세요

언제나 마음과 행동을 살피세요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고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고 귀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청담스님의 딸로 세인들에게 유명한 세주묘엄스님(1931~2011). 하지만 묘엄스님은 동학사·운문사 강원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로 불교계에서 위상이 크다. 성철스님에게 선을 배우고, 자운스님에게 율을, 운허스님에게 경을 두루 배웠다.

비구니 스님들은 공부도 제대로 못 배우던 시절, 묘엄스님은 폐사와 다름없던 수원 봉녕사에 들어와 불사를 시작했다. 없던 길을 내고, 전각을 세우고 비구니 강원을 일으켰다.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강원이었다. 50년 세월을 강단에 섰던 묘엄스님은 2011년 12월2일 봉녕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스님은 봉녕사를 떠났지만, 대웅전의 화려한 꽃살무늬 문은 묘엄스님의 아름다운 삶을 대변하듯 남아 있다.

스님의 입적 5주기를 맞아 일대기를 그린 만화 <연꽃향기로 오신 묘엄스님>이 발간됐다. 배종훈 작가가 그림을, 이미령 칼럼니스트가 감수를 한 책으로, 묘엄스님을 통해 근대 한국불교 비구니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

묘엄스님을 찾아 뵐 때면 늘 두가지 당부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미뤄놓지 말아라.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유념해야 한다”는 것과 “절대 생명을 해치지 말고, 가급적 채식을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스님의 삶이 그랬다. 

그 가르침은 성철스님과 자운스님에게서 왔다. 한번은 비구 스님들이 승복을 만드는데 일손이 부족하자 윤필암에 있던 비구니 스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철스님은 크게 노해 그 가사를 입지 않겠다고 했다. “성철스님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비구와 비구니 모두 독립적이고 청빈한 삶이 수행자의 기본”이란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지금은 스님들의 탁발이 금지돼 있다. 사회 여건상 자칫 좋지 않은 불교의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대중이 함께 탁발을 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봉녕사에서 매년 10월 개최하는 사찰음식문화축제에서 탁발의식을 하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한번은 묘엄스님과 묘희스님이 함께 탁발을 나가게 됐다. 탁발에는 많은 규칙이 있었다. 탁발을 위해 합장 인사를 한 후 <반야심경> 독경을 하는데, 시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중에 그만두어도 안되며, 시주를 받든 못 받든 합장인사를 하고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배종훈 화백이 만화로 엮은 묘엄스님의 삶. 탁발을 나섰다가 절에 돌아오는 길에 걸인을 만나자 탁발한 식량을 아낌없이 전해주던 마음은 한국불교를 일으킨 근본이 됐다.

추운 겨울 탁발에 나선 두 비구니 스님은 넉넉하게 쌀을 받아들고 사찰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점촌에 있는 절로 가는데, 다리 밑에 가마니로 바람을 막고 사는 걸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묘희스님, 우리가 탁발한 양식을 저 걸인들에게 주고 가는게 어떻겠어요?” 묘엄스님의 뜻에 묘희스님도 흔쾌히 동의했다. 힘들게 구한 식량을 모두 그들에게 주고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아이를 업고 추위에 떨고있는 걸인 여인을 만났다. 그 모습이 안쓰럽던 묘엄스님은 “우린 절에 가면 따뜻한 방이 있으니 내복이 없어도 된다”며 내복을 벗어 그 여인에게 줬다. 

얼마 후 봉암사에 들렀다가 청담스님을 만나 그때 일을 말했다. 청담스님의 대답은 한마디였다. “잘했다. 하지만 줬다는 생각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 재가자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은 봉녕사에 스님이 주석할 때, 많은 불자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또 다른 일화. 1949년 봄, 산나물을 뜯으러 묘엄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산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빨치산을 만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총을 들이밀고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스님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부처님 계율을 지키며 단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어기고 백년을 살아 무엇하겠느냐. 북으로 데리고 가려면 우릴 차라리 죽여라.” 그제서야 빨치산이 실토를 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가은지서장입니다. 빨갱이들이 스님으로 변장하고 숨어들어 온다고 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스님들은 대중이 많은 윤필암 등으로 흩어졌다. 한국전쟁이 임박하면서 스님들의 수행여건도 점점 힘들어졌지만, 불법을 모두 익혀 세상을 구하겠다는 묘엄스님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묘엄스님의 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 손수 행동으로 보인 때문이다. 

“항상 자신의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세요. 언제나 자기 마음과 행동을 살피세요.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고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은 귀한 사람입니다.” 스님의 가르침은 남아 있다.

[불교신문3257호/2016년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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