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혜명ㆍ통도사 불사의 뗏목  

통도사 영각에 모셔진 화악당 태영 선사 진영.

頂以圎袍以方
釋尊七十代之貽

厥談柄松精進鎧 
苦海八十年之寶筏

畵綃傳神日沒留曛
頭上有月足底生雲

머리는 둥글고 옷은 가사를 입었고
석존으로부터 칠십대이다. 

똥 막대기의 화두와 불자로 설법하며 정진했는데
팔십년 고해를 건너는 좋은 뗏목이었다. 

그려진 진영은 석양 빛이 머무는 것 같고
머리 위에는 달이 있고 발아래에는 구름이 생한다.

성담의전(聖潭儀典, ?~1854) 스님이 화악태영(華岳泰榮, 1823~1845 활동) 선사 진영에 올린 영찬이다. 성담스님은 19세기 후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돈독한 교우관계를 나눌 정도로 학식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런 이유로 성담스님은 화악스님의 영찬을 비롯하여 백암관홍(白巖寬弘)과 울암경의(蔚菴敬儀)스님의 영찬을 짓고 덕암대사유공기(德巖大師有功記, 1842), 통도사 영자전 상량문(1843), 밀양 표충사 삼화상제영(1848)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특히 영찬을 올린 스님들은 같은 문중어른은 아니지만 스승인 청담준일(淸潭俊一)스님과 오랫동안 수행과 불사를 함께 하셨던 산중어른들로 성담스님이 가까이서 뵙거나 직접 모셨던 분들이다. 문중을 초월해 자신이 존경했던 스님에게 올리는 찬문답게 성담스님은 석가모니불의 71세손이자 출가자로서의 위의(威儀)을 갖추었던 화악스님의 80년 삶과 진영을 통해서라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글로 풀어내었다. 

화악스님은 설송연초의 4세손으로 응암희유의 손상좌이자 경파경심의 제자이며 동명만우와는 동문이다. 화악스님은 1823년에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무풍교(舞楓橋)를 개조하는 불사에 참여한 후 통도사 영자전 건립(1843), 지장전 중수 및 개금불사(1845) 등에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마음으로 동참했다. 통도사에서 화악스님의 문도(門徒)는 동명스님만큼 번성하지 않았으나 스승이 입적하자 진영을 모시기 위해 법제자 성월홍진(性月弘震), 봉림(奉琳)이 주축이 되고 상좌인 선우(先宇), 도홍(道洪)와 정문(定文), 봉흡(奉껒) 등의 계상좌(戒上佐)가 뜻을 모아 문계(門契)를 결성했다. 1853년에 화승 문성(文性)과 덕유(德裕)가 진영을 완성하자 제자들은 성담스님을 찾아가 자신들의 추모의 마음을 전하였을 것이며, 성담스님의 흠모의 정이 영찬이 더해진 진영은 여러 선사(先師)들의 진영과 나란히 통도사 영각에 모셔졌다. 

해제=조계종 문화부장 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불교신문3256호/2016년12월1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