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 개혁과 항일독립운동의 거점

하늘에서 바라본 함양 화과원. 법당과 요사채 등이 화과원의 역사를 대신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을 열망했던 용성(龍城)스님은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해 1927년 함양에 화과원(花果院)을 건립했다. 불가(佛家)의 수행이 산중에 머무는데 그치지 않고, 민초들의 삶의 현장에서 불법(佛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원력이었다. 진종삼 화과원 사적지 지정 추진위원장, 최영호 동아대 교수, 장경일 전 경남도 홍보담당, 함양군청 등의 자료 협조와 자문을 구해 화과원을 조명했다. 장수 죽림정사에서 발간한 <3대대사연보(三代大師年譜)>도 참고했다. 

함양 화과원은 지난 2000년 8월 경상남도 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咸陽 白龍城 禪師 花果院 遺墟址)’ 다. 국가 사적지 지정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진종삼 위원장(제12교구 신도회장)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용성스님의 뜻이 깃든 화과원이 도(道) 기념물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정부에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용성스님의 독립정신을 후대에 바르게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1월14일 경남 함양군청에서 열린 ‘백용성 선사 화과원의 유허지 국가사적 승격지정을 위한 연구용역사업 보고 및 자문회의’에서는 일제강점기 화과원의 규모와 활동 상황 등이 소개됐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50번지 백운산(白雲山)에 위치한 화과원의 규모는 상당했다. 우선 약 29만7520㎡(약 9만평, 또는 약 30여 정보) 규모의 임야와 황무지와 논밭, 대지, 잡종지 등 147만9864㎡(약 44만7659평) 이르렀다. 화과원 토지는 용성스님을 비롯해 최창운(崔昌雲), 고봉운(高鳳雲), 서문길(徐文吉), 김순명(金順明) 등이 재원을 마련해 구입했다. 이후 용성스님이 왜색불교 침탈을 방지하는 한편 신불교(新佛敎) 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대각교(大覺敎) 중앙본부에 편입됐다. 하지만 경성의 대각교당에 예속되지는 않고, 독립적인 형태를 지니며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수 죽림정사에서 발간한 <3대대사연보>에는 함양 화과원 설립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1927년) 태현(太玄)동헌스님, 재현(在玄)스님, 최 상궁마마, 고 상궁마마, 그 외 여러사람, 임동수 거사 등과 합류하여 용성조사를 모시고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 화과원 설립법회에 참례했다. … 과수 수만주를 심고 동시에 일하면서 참선수행하고, 참선수행하면서 일을 하는 선농불교를 일으켰다. 조선불교 참선수행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으니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조선총독부 아래의 힘겨운 사원경제를 극복하여 나아가 우리 민족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경제력을 향상함으로써 민족경제를 회복하는 역량을 기르고자 함이었다.”

함양 화과원은 과수원을 비롯한 논밭 등의 토지는 물론 법당과 포교공간을 구비하고 있었다. 선원(禪院)과 어린이들의 교육공간도 갖추고 있었다. 앞서 밝혔듯이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자리이타(自利利他),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화과원의 과수원에서는 감나무, 밤나무, 배나무 등을 경작했고, 밭에는 감자를 재배했으며, 논농사도 함께 했다. 이와 함께 임야(林野)에는 벚나무, 진달래, 작약, 산벚나무, 월계화(月桂花), 단풍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을 심었다. 최영호 동아대 교수는 “화과원은 농장이나 과수원의 의미보다는 경성 대각교당의 지부인 교당(敎堂)이나 선원(禪院)의 포괄적인 명칭으로, 논밭, 과수원과 법당, 교육공간 등의 건축물을 모두 포함한다”면서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수도 생활을 했던 선승들과 함께 지역사회의 아이들도 노동 인력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용성스님은 화과원을 근거지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불가의 수행을 근간으로 농사 등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불교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불교개혁운동을 펼쳤다. 즉 화과원은 불교의 수행공동체인 동시에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중심기지였다. <3대대사연보>에는 전국 불교계에서 모금한 자금을 함양 화과원으로 모두 모은 후에 뱃길과 산길로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영호 교수는 “화과원은 항일민족운동과 불교개혁실천운동의 거점으로 역사 문화적 성격이 있다”면서 “조선불교의 자생적 개혁과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선농불교의 거점”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대각교의 포교 및 불교의례 등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면서 “특히 불교경전의 역경, 저술 공간 및 선지식들의 선수행 공간으로도 역할했다”고 덧붙였다. 

1998년 3월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한 백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불교개혁, 사회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스님은 1922년 중국 만주 명월촌(明月村)과 봉녕촌(鳳寧村)에 각각 69만4215㎡(약 70정보)의 농지를 마련했다. 명칭은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으로 했다. 용성스님은 “우리들이 안일에 취하고 게으름에 빠져 도덕을 닦지 아니하고 개인의 이익만 얻고자 하여 시주(施主)에게 아부하니, 막중한 성전이 무도장(舞蹈場)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면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보면 경솔하고 거만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경책했다. 

화과원 법당. 왼쪽부터 화과원, 봉서대, 염화실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제공=혜원스님

함양 화과원 국가 사적 지정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진종삼 위원장은 “용성 선사가 수많은 선승들과 피땀 흘리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던 화과원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지 못하고 황폐한 채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우리 후손들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이제라도 국내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 손으로 가꾸어 국민들에게 제대로 홍보할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진 위원장은 “(용성스님은)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을 개설하여 수만 주의 과수를 심게 하여, 참선하며 일하는 선농일치의 불교운동을 벌여갔다”면서 “그리하여 실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힘겨운 사원경제의 자립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민족경제의 회복과 독립운동 자금의 조성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고 강조했다. “이는 민족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나 경제적 자립없이 진정한 독립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스님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종삼 위원장은 화과원 국가 사적지 지정과 함께 용성스님을 주제로 한 한중합작영화 제작도 제안했다. 3·1절 100주년이 되는 2019년 개봉을 목표로 추진하길 희망한 진 위원장은 “화과원 국가 사적 지정 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백용성 선사가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민족, 불교진흥에 엄청난 공적을 쌓은 위대한 대종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백용성 선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만공(滿空)선사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혜명(慧命)을 이은 불대종사로서 영화에 담을 이야기 거리는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강조했다.  

용성스님 진영.

[불교신문3255/2016년1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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