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박소란의 시 ‘다음에’ 중에서)

다음이라는 말을 입에 넣고 굴려보면 제법 다정하다. 어감이 부드럽고 은근해서 되뇌이게 되는 말. 다음은 미래를 향하는 말이기에 멀고 아득하지만, 다가올 시간을 약속하는 달콤한 말이기도 하다. ‘조만간’, ‘언젠가’, ‘꼭 한 번’ 등도 이러한 계열의 말들이다. 연말이 다가오니 점점 더 이런 이야기들을 입 밖에 낼 일이 많아진다. 그 말이 가진 공허함과 쓸쓸함의 기운을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약속을 해야 안심이 되는 성정이라 더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다음들을 약속하며 산다. 그 다음들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이라는 말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올 때 그 말은 뾰족해진다. ‘지금’을 기대하던 이라면 더 그렇다. 원하지 않는 다음을 마주칠 때 그 말은 모르는 세계의 언어가 된다. 그럴 때 다음은 약속이 아니라 머나먼 유예의 말이 된다. 사랑이 아니라 도피와 외면의 말로 변한다. ‘다음에’의 비밀을 알게 되는 일에 우리는 관계의 대부분을 바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한 시절을 친하게 붙어 다녔지만 이제는 연이 다한 친구와 굳이 다시 만나고 돌아온 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떨어진 꽃을 주워 다시 나무에 붙일 수 없다”고. 시절 인연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끼리의 연은 억지로 되돌릴 수도 떨어트릴 수도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굳이 불러와 되풀이하지 않아도 괜찮은 다음들도 있다. 떨어진 꽃은 아쉽고 참담하지만, 그 시들고 말라가는 자리 역시 존중해 주어야 할 장면일 것이다. 

박소란 시인은 시 ‘다음에’에서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다”고 말한다. 시인에게 다음은 그 내용보다도 앞선 형식이며 약속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수많은 약속의 힘으로 생을 떠밀리고 이끌기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기약과 유예의 반복.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우연들과 우연이 이끄는 인연의 자리로. 그래서 다음이라는 말은 두렵고 슬프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찬란한 빛을 오래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빛의 형상이 떠올라 오래 지워지지 않듯, 우리가 약속한 다음들은 잔영처럼 남아 생의 남은 시간들을 비춘다.

[불교신문3255/2016년12월7일자]

이혜미 시인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