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에서 친견할만한 스승

挻然其特頎然其長大

耳垂珠便腹而廣顙者 師之像也

一幅龍眠 或可髣髴 其儀狀至

若滿腔慈悲 方便無量

念念南無六道廻嚮

戒行則一刀兩段 襟韻則太和春風

大乘小乘 南源北宗辨之

若黎哲淄澠 於其中者

是豈丹靑之所能形容哉

明月自在 白雲孤往 苟因果之不爽

異日庶幾見斯人於兜率靈山之上

빼어나고 특이함은 풍채가 장대하고/ 귀불이 구슬 같으며 배가 나왔으며 이마가 넓다./ 스님의 모습이다.// 한 폭의 진영이 조금은 비슷한 것 같으나 그 위의와 모습은 똑같다.// 마음속에 자비로 가득하고 방편이 무량하며/ 생각 생각이 육도 회향하는 것이다.// 계행은 단칼에 베는 듯하나, 옷깃에서는 태화강 봄바람이 분다.// 대승과 소승 남종 북종을 모두 구분함이/ 열자의 치수와 승수를 분별함과 같다. 저 가운데를/ 어떻게 단청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 밝은 달은 자유롭고 구름은 홀로 흘러가니 참으로 인과가 분명하다.// 다른 날에 몇 명이나 이 사람을 도솔천 영산회상에서 볼까?

남정철(南廷哲, 1840~1916)이 1891년에 오성우축(五聲右竺, 186 6~1890 활동)스님을 위해 지은 영찬이다. 찬자 남정철은 조선말기 성리학의 대가인 유신환(兪莘煥, 18 01~1859)의 문하로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배웠으며, 공조참판, 한성판윤, 내부대신 등 고위 관료를 지냈다. 또한 덕수궁 대한문 중수 현판을 쓸 정도로 글씨에 뛰어났다.

통도사에 모셔진 오성스님 진영에 적힌 영찬은 정성이 깃든 정연한 필치로 보아 상찬(像讚)으로 보내온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하다. 어떤 인연으로 남정철이 오성스님의 영찬을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스님의 풍채를 회상하며 ‘진영도 이와 같다’는 문장으로 보아 생전에 교류를 나누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성스님은 설송연초의 7세손으로 응암희유-경파경심-동명만우-학송이성(鶴松理性)-쌍호회권(雙湖會䠰)의 법맥을 계승했다. 통도사에 주석했던 설송 문도가 모두 그러하였듯 오성스님 또한 수행만이 아니라 문중에 구애받지 않고 사찰의 크고 작은 불사에 동참해 사세를 지켜나갔다. 1866년과 1868년에 우담유정스님이 통도사 안양암 중수와 통도사 보상암 신축 불사를 주관하자 화주와 시주자로 참여하였고 1890년에는 통도사 명부전 중수를 돕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운원기스님이 통도사 백련암에서 금자법화경을 사경할 때에는 주지이자 도감으로 사경 불사를 1880년에 마무리했다. 이를 아는 듯 찬자는 무량한 방편으로 자비를 베푼 오성스님이 그 공덕으로 도솔천에 계심을 노래하였다.

해제=조계종 문화부장 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불교신문3254/2016년12월3일자]

해제=정안스님 설명=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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