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벗어나려면 지금 당장 이 몸으로 붓다로 살자”

보통 화엄경 화엄대해에 비유

방대한 가르침 담고 있기 때문 

부처님 마음 보살·불자 마음

중생마음 따로 있는 것 아냐

우리 모두 부처님 지혜 구족

중생은 모두 환(幻)과 같아

부처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철저히 믿는 신심을 바탕으로 

발보리심 일으켜 붓다로 살자  

지난 11월25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53선지식 구법여행’ 초청법사로 나선 해주스님은 “보현보살과 지장보살을 닮아 공덕을 쌓아가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라며 “정정진으로, 화엄의 큰 바다에서 항상 행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우리 시대 선지식을 초청해 법문을 듣고 진리를 찾아보는 11월 53선지식 구법여행은 ‘중중무진 화엄바다로의 항해’를 주제로 열렸다. 본지와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는 지난 11월25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30여 년 동안 동국대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해온 해주스님을 초청해 법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열세 번째 초청법사로 나선 해주스님은 이날 “어떤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쓸 수 있는가에 따라 중생이기도 하고 보살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며 부단한 수행정진을 당부했다. 동학사승가대학을 나온 해주스님은 1978년 동국대에 입학해 1982년에 졸업했다. 이후 동 대학원에 입학해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30여 년 동안 동국대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해온 스님은 비구니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동국대 정각원장을 지냈으며, 불교학연구회 초대·제2대 회장, 동학사승가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20여 편의 단행본과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다음은 이날 법문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와 불교신문이 공동주관하는 53선지식 구법여행에 동참하게 된 인연을 소중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중중무진 화엄바다로의 항해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다. 

보통 <화엄경>을 일컬어 화엄대해라고 한다. 수많은 불교경전 가운데 대해라고 이름을 붙여 이야기하는 경전은 화엄경이 대표적이다. 큰 바다라는 이름은 왜 붙였는가 하니, 굉장히 방대하고 심심미묘해 헤아리기 어려운 경전이기 때문이다. 큰 바다의 공덕에 비유해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경전이다. 화엄 행자의 삶과 마음을 주제로 특히 바다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화엄경 교설에 초점을 맞춰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우리의 삶은 중생의 삶과 부처님으로 사는 삶, 부처님의 아들딸로 사는 불자의 삶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고해바다에 사는 중생이다. ‘바다’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스치는 의미는 고해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사 고통을 참아야 하는 사바세계이다. 사바세계에서 고통을 참아야 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중생이다. 미혹중생이라고도 한다. 4고(苦)와 8고 등의 무상고(無常苦)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세계에서 헤매는 것이다. 오래가지 않을 것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는 바람에 겪어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끝없이 재생된다. 설사 선업을 짓는다 해도 생천할 수 있는 복(유루선, 有漏善)은 되지만, 윤회는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윤회를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무루선(無漏善)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를 통해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육정 즉 육근의 방일함에 대해서도 참회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중생은 참회해야 할 업장이 두텁고 계속해서 업을 지어가는 이들이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업을 지어 놓고도 업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죄는 자성이 없지만 지은 업의 업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처음 한 번 지었을 때는 마음을 바꿀 수 있지만 너무 많이 지으면 업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계속 나쁜 일만 하다가 어쩌다 한 번 좋은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옆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다. 반대로 착한 일만 하다, 나쁜 짓을 한 번 하면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한다. 그래서 참회할 줄 알고 죄나 업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받는다. 그것이 중생이다. 

원효스님은 참회를 해도 그 실상을 바로 알고 참회하라고 하셨다. 만일 방일하고 뉘우침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으며, 업의 실상을 사유할 줄 모르면 비록 죄의 자성이 없지만 장차 지옥 고통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마치 환술로 만든 호랑이가 도리어 환술사를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幻虎還呑幻師)는 비유로 경책하셨다. 

중생의 경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본래 생겨난 게 없는데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낸다. 이를 꿈으로도 비유를 들었다. 어젯밤에 꿈을 꾸다 금방 깨면 꿈인줄 안다. 실제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보통은 꿈인 줄 모르고 떠내려가고 있다.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 전부 꿈이다. 그것을 대몽이라고 한다. 긴 꿈에서 미혹에 덮인 마음에 의해 다 만들어냈는데, 자기 마음이 만든 환인지 모르고 거기에 화를 내고 집착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대부분 깨워달라고 하지만, 자기가 깨어나야 한다. 발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원효스님은 ‘몽관’을 하라고 하셨다. 꿈인줄 알고 헛된 것인줄 알고 ‘꿈이다’하면서 관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다보면 탐욕도 부리지 않게 되고, 미혹에 의한 행동도 안 한다.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면 보살이라고 한다. 불자들은 보살행을 한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붓다로 살자. 지금 여기서 당장 이 몸으로 붓다로 살자. 

<화엄경>에서는 깨달음을 바다에 비유해 각해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라는 화엄경 제일게는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의상스님(625~702)은 ‘법성게’에서 이 마음을, 모든 존재를 ‘법성(法性)’이라 명명하고 있다. 오척되는 우리 몸과 마음은 오척법성신(五尺法性身)이다. 이 오척법성의 법성신을 바로 보기만 하면 십불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붓다로 살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의상스님은 또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한 경계를 해인삼매라 한다. 해인삼매는 화엄경의 모든 삼매를 통틀어 포섭한 것으로, 바다에 도장 찍듯이 일체 물상이 다 비쳐 나타난다는 비유로 말한 부처님 삼매이다. 바다에 모든 물상이 비쳐 나타나 있으나 실은 다 바닷물뿐인 것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에 비친 온갖 존재 역시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뿐이다. 

세 번째는 공덕행을 실천하는 보살, 바로 불자의 삶이다. 부처님의 아들딸로 사는 것이다. 각(覺)한 중생, 이미 깨달으셨는데 중생을 위해 더불어 동사섭하는 보살님, 그리고 범부들이 ‘앞으로 성불하여지이다’ 하는 발원을 갖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닦아나가는 보살 그 모든 분들이 불자다. 중생을 본래 자기로 인도하는 이타의 삶을 사는 분들이다. 이런 보리심에 의해 보살도를 실천하는 화엄바다는 공덕의 바다(功德海)이다. 

중생·붓다·불자(보살)의 삶을 고해·각해·공덕해를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해 설명해 보았다. 하지만 실은 이 셋이 다른 것이 아니다. 고해가 바로 각해이고, 각해가 공덕해로 중중무진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발심해 공덕을 짓는 보살의 마음이 바로 자성청정심이고 여래의 지혜 마음인 것이다. 중생의 힘은 업력이고, 불자와 보살의 힘은 원력이며, 붓다의 힘은 신통력이다. 그런데 그 모든 힘은 곧 마음이다. 마음따라 존재의 모습이 달라지고 마음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고, 마음따라 살기 좋은 세상, 살기 힘든 세상이 펼쳐진다. 어떤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쓸 수 있는가에 따라 중생이기도 하고 보살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처님 마음, 보살·불자 마음, 중생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근본은 다 부처님 지혜 마음인 한마음뿐이다. 그 마음을 바로 쓰면 된다. 사유 분별하는대로 한량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 지혜를 구족하고 있다. 예부터 이미 온전한 오척법성(五尺法性)을 바로 보고, 본래자기로 되돌아가자. 설사 법성신을 바로 보아 지금 여기서 부처로 출현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님 지혜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철저히 믿는 신심으로 보리심을 일으켜, 자리이타의 공덕행을 지어가자. 보현행원으로 보리를 이루자.

부처님과 같은 만덕을 쌓아가는 행위가 수행이다. 보현보살을 닮고 지장보살을 닮아서 공덕을 쌓아가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다. 화엄경에는 무진장한 수행법이 있다. 중생은 다 환과 같다. 발보리심하고 붓다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자. 이미 우리는 벗어났다. 불자로 오래 살다 보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다. 정정진으로, 화엄의 큰 바다에서 항상 행복하시길 바란다. 

[불교신문3254/2016년12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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