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아 갔던 산사에도 

안개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

산사를 뒤로하여 

산을 내려오고 있을 때

때마침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일주문 쪽에서는 

노스님께서 올라오신다

합장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순간, 연사모종도에 그려진 

스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산사 몇 곳을 둘러보는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의 끝자락에서는 그것이 보는 답사였는지, 아니면 느끼는 답사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항상 그렇듯이 산사 답사의 백미는 해질녘 산사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올 때다. 느끼는 답사일 경우다.

실제로 가서 보고 느끼는 것이 답사의 목적인데, 밝은 대낮이 답사하기 좋지, 잘 보이지도 않는 해질녘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해질녘이 되면, 산사만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있는 산 전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종소리다.

절에서는 새벽과 저녁에 종을 친다. 종은 새벽에 28번, 저녁에 33번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횟수는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는 종각의 이름이 알려주듯이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천(四天王天)과 꼭대기의 도리천(利天) 등 28개의 하늘나라(天)와 관련된다. 종을 치는 것이 이들 하늘나라의 문을 새벽에 열고 저녁에 닫는 의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산사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새벽 종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저녁 종소리는 들을 기회가 있어도 몇 번 치는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종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에 흘러들어가는 물길 중에서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을 여덟 개의 화폭에 그린 것을 말한다. 맑은 기운이 감도는 산간 마을, 안개 낀 산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어촌에 물든 저녁노을, 멀리서 포구로 돌아오는 배, 소수와 상강에 내리는 밤 비,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잔잔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강촌에 내리는 저녁 눈이 주제다. 

소상팔경도에서는 종소리 외엔 산간 마을, 어촌, 배, 밤 비, 가을 달, 기러기, 눈 등 모두 시각적인 장면이 표현된다. 소수와 상강, 동정호를 배경으로 삼아 이미 초(楚)나라 때부터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어 왔으나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은 송(宋)나라 때부터다. 그런데 안개 낀 산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즉 연사만종(煙寺晩鐘)의 모습은 어떻게 그렸을까? 전해오는 그림들에서는 안개 낀 산 중턱에 조그마한 산사가 있고, 멀리서 산사를 향하여 돌아오는 스님이 등장한다.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 1152~ 1220)가 지은 시 ‘연사만종’은 이러한 서정적인 분위기를 보다 쉽게 연상하게 만든다. “굽이굽이 돌길은 흰 구름에 가리고/ 바위 위의 무성한 나무들은 저녁 빛에 더욱더 짙어지네./ 알고 있는 절은 푸른 절벽 너머 있는데/ 때마침 부는 바람이 종소리를 울리네.” 

이인로의 시를 굳이 그림으로 옮겨 놓는다면, 그곳엔 절도, 종도 없고 오로지 바위 위의 무성한 나무와 절로 통하는 돌길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안개 낀 산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가을비가 내린다. 내가 찾아 갔던 산사에도 안개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 산사를 뒤로하여 산을 내려오고 있을 때, 때마침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일주문 쪽에서는 노스님께서 올라오신다. 합장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순간, 연사모종도에 그려진 스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불교신문3243호/2016년10월26일자] 

배재호 논설위원·용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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