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이 대각 이루어 부처가 되라” 서원 남기신…

서울 성북동 삼선승가대학원에서 지난 12일 장학금 전달식이 봉행됐다. 장학금을 수여한 단체는 용성진종장학재단으로 원로의원 도문큰스님이 총재로, 평택 명법사 회주 화정스님이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장학재단이다. 이날 행사에서 도문큰스님은 “오늘 귀한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불교의 미래를 책임져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어려운 시기, 나라와 불교를 이끌어오셨던 용성스님의 뜻을 이어 불교의 앞날을 이끌어 달라”고 법문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용정진종장학금은 화정스님의 원력으로 조성됐다. ‘삼선승가대학 1기 졸업생’ 화정스님은 “용성스님의 서원은 모든 중생이 대각이 이루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라는 것이었다. 삼성승가대학원은 그 원력을 교육하는 곳”이라며 장학재단 설립의 목적을 밝혔다.

1978년 9월 의정부시 호원동 약수선원에 ‘주림(珠林)강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삼선승가대학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봤다. 더불어 불교를 일으키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보내신 용성조사 선양사업을 추진 중인 명법사 회주 화정스님을 만나 계획을 들었다.

나라의 독립위해 헌신하며

불교 현대화 기틀 다진 스님

용성진종스님

“우리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소. 와서 잡아가시오.” 민족의 기개를 되살린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직후, 용성스님은 참가자들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숨키고 제자 동헌큰스님을 시켜 신고를 하도록 한다.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헤어지면,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지 않을 것을 우려한 이유였다. 그리고 스님은 1년6개월의 옥고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반인들에게 용성스님(1864~1940)은 31운동 33인의 지도자 가운데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일경의 지속된 감시에도 아랑곳없이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수차례 전달했다. 또 1922년에는 만주 연길 평원촌과 봉녕촌에 농지를 마련하고 선농당을 설립, 걸식하던 동포들을 불러모아 농사를 짓게하고 남는 농산물은 독립군 식량으로 사용했다. 또 경남 함양에 임야를 구입해 수만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고, 여기서 나온 이익금을 독립자금으로 썼다.

이런 스님은 당연히 조선총독부에게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1931년 일제는 서울 종로 대각사를 몰수하고, 1940년 스님이 입적하자 다비식마저 철저히 방해하기 위해 검열을 실시해 소수의 상좌 스님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민족을 위해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던 스님은 또한 왜곡된 불교를 바로 세우는데 큰 업적을 세웠다. 감옥에서 용성스님은 기독교인들이 누구나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는 것을 보고 출소하자마자 경전 역경사업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불교의 모든 경전은 한문본이었으며, 역경작업을 하자 “누구나 알 수 있는 한글로 경전을 풀어놓으면 스님을 우습게 알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불교의 대중화’를 주창하며 법회에 풍금을 도입하고 찬불가를 작사하며, 역경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불교가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야 한다”는 원력이었다.

스님은 또 1924년 잡지 <불일>을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로 일요불교학교를 열며 어린이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렸다. 모든 불교 의식과 염불을 한글로 고치고, 찬불가도 직접 작사 작곡했다. 이때부터 불교는 구태를 버리고 급속히 근대화 현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용성스님은 15세에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해 ‘사람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해 깨달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금강산 표훈사로 만행을 하다가 한 노스님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다가 한방에 무시당했다. 다시 ‘무’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던 스님은 22세 되던 해 ‘대오각성’을 이룬다.

깨달음을 얻고 중국에 머물면서 대선사로 추앙받던 스님은 “겨레를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생구제”라며 조선으로 돌아와 서울 중심지인 종로에 대각사를 창건하고, 불교 계몽운동을 펼쳤다.

스님은 열가지 유훈을 남기고, 1940년 음력 2월24일 조국의 광복을 몇 년 앞두고 원적에 들었다.

■  삼선불학승가대학원, 어제와 내일

도문큰스님

 

38년간 비구니 스님 교육불사에 매진해온 지광스님(사진 오른쪽)과 묘순스님.

서울 성북구 도심에 위치한 삼선포교원.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삼선포교원을 들어서면 경주 분황사 전탑을 본뜬 탑이 오롯이 서 있다. 국내 유일의 ‘비구니 통학(通學) 교육기관’인 삼선불학승가대학원이다.

삼선(三仙)이란 명칭은 불법승 삼보를 호지하겠다는 서원을 담았다. 삼선불학승가대학원이 설립된 것은 불과 2년. 하지만 역사는 1978년 9월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공부를 하려는 비구니 스님들의 열기를 담아낼 강원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바쁜 절일을 봐야 하는 형편상, 절을 떠나지 못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광스님과 묘순스님이 의정부 호원동 약수선원에 주림강원을 열고 “불편한 통학을 감내하면서라도 공부하고 싶어하는” 스님들을 거둬들였다. 통학의 편리를 위해 강원을 서울로 이전, 월세를 전전하다가 1983년 현 위치에 승가대학을 건립했다.

그렇게 시작한 강원은 명법사 회주 화정스님을 비롯해 39명의 학인 스님들을 모아 첫 강의를 연 이후 2014년까지 총 26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기본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마무리했다. 출가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출가 후 교육과정이 체계화되면서 입학생이 줄어든 것. 30회 졸업식을 끝으로 삼선승가대학은 불학승가대학원으로 변모를 달리했다. 2년 과정의 승가대학원은 승가대학을 졸업한 비구니 스님들을 대상으로 전문화된 경전 강의와 논강 등을 진행하며, 인천을 이끌 사표를 육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삼선불학승가대학원이 오늘에 위치하기까지는 비구니 지광스님과 묘순스님의 원력이 바탕이 됐다. 원장 지광스님과 학장 묘순스님은 학인들에 대한 강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38년 세월을 교육불사로 일관했다.

묘순스님은 지난 12일 용성진종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에서 “불교가 지금의 모습에 오기까지 수많은 스님들의 헌신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불교탄압과 일제의 한국불교말살 정책에 맞서 수행과 포교로 세상을 이끌어온 스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불교가 있다”고 강조하고 “일제강점기 용성스님이 한국 최초로 역경불사와 찬불가 작곡 등 선진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지금 한국불교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후학들이 그 정신을 이어 불교발전에 많은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며 승가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누가 이 혼탁한 세상을 구하겠는가”

깨달음의 사회적 회향 위해

언행일치 수행하며 헌신

14년간 원로의원 도문큰스님과

용성스님 유훈 실현에 나서…

■  인터뷰/ 용성진종장학재단 이사장 화정스님

많은 사람들은 바쁘게 살면서 자신의 뿌리를 잊고 산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온 우주의 기운이며, 도반이고 스승이다. 대만 비구니승가회가 선정한 ‘한국의 비구니 걸출상’ 수상자인 평택 명법사 회주 화정스님은 ‘인연법’과 ‘언행일치’를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지난 12일 서울 삼선포교원에서 용성진종장학재단을 설립한 화정스님을 만났다.

“이 세상이 너무 오염되고 혼탁했다. 만약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어느 스님이나, 목사나 신부가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도 기필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출가를 하리라.” 

젊은 나이의 화정스님은 굳은 출가의 결심을 하고 서울 청룡사로 향했다. 당시 청룡사에는 현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명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 위해 가던 도중, 버스에서 만난 한 스님과 인연은 화정스님의 발걸음을 평택 명법사로 이끌었다.

“출가 후 강원 여러곳을 찾아다니며 강의를 들었어요. 사교까지 배우고 나서 선방에서 참선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묘순스님에게 화엄경 강의를 듣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사사무애법에 대해 강의를 듣는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면서, 환희한 세계가 열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화정스님은 삼선승가대학 1기 졸업생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구도의 여정은 <화엄경> 공부를 통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화엄경>에 나오는 ‘누가 와서 눈을 달라 하거든 눈을 빼어주되, 가는 길을 밝혀주라’는 대목에서 의구심이 가득 들어찼어요. 눈이 없는데 어떻게 길을 밝혀 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지혜의 눈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대승의 수행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삼선승가대학에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한 방울의 자비수가 산골을 적시고 시냇물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언행일치 수행을 하며 명법사 불사를 하던 스님에게 심부전증이란 중병이 찾아왔다. 스님은 출가 후 환속해 한의사로 활동하던 무여거사를 찾았다. 스님의 병을 알아챈 무여거사는 “중생을 버리고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을 버리라는 말에 화정스님이 즉답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약이나 주세요.” 무여거사가 답했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약이 없습니다.”

불과 37세의 나이, 결국 죽음에 다다른 스님은 ‘왜 병이 들었을까’ 생각을 했다. 병의 원인은 ‘반듯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의심이 극에 달하면서 화정스님은 ‘곡불장직(曲不藏直)’ 화두를 풀었다. 수덕사 혜암스님에게 받은 ‘구부러진 것 안에 곧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화두를 풀어낸 것. 그렇게 스님은 죽음을 넘어 12시간 만에 다시 깨어났다. 깨어나고 나니 법문이 물처럼 쏟아져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스님은 수덕사 원담스님에게 연락을 했다. 스님이 와서 “지금 견성했으니 보림을 하라”했다. “스님, 저는 지금 명법사 불사를 해야 합니다.” “지금 밥이 끓었는데, 보림하지 않으면 밥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화정스님은 보림 대신 명법사 불사에 매진했다.

다시 원담스님을 만난 것은 10여년 세월이 흘러 48세가 되던 해. 내원사에서 입승으로 수행하던 선경노스님이 입적했다. 명법사에서 스님의 49재를 모시는데 수덕사 원담스님이 찾아왔다. 원담스님을 본 화정스님이 법거량을 던졌다.

“스님, 골은 밥 버렸으니 저는 이제 밥을 지으러 갑니다.” “그래, 어디로 가느냐.” 몇 마디 법거량을 마친 원담스님에게서 “법상을 차려라. 인가하리라” 대답이 돌아왔다. 

“인가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너 도인이라는 증명서다.” 다시 화정스님이 답을 했다. “그 증명서가 우는 여인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이 되나요? 배고픈 사람에게 라면이라도 될까요?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가난한 아버지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 저는 차라리 이 나라와 민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용성조사 유훈을 실천하고 계신 도문큰스님께 불사하겠습니다.”

화정스님이 처음 도문큰스님을 만난 것은 22세 때, 경주 분황사에서였다. 도문큰스님을 보면서 ‘아, 이 세상을 위해 사시는 스님이 계시구나’ 생각을 했다. 화정스님은 도문큰스님에게 신도들을 위한 법문을 요청했다.

“한낱 비구니가 몸이 병들었다는 말에 도문큰스님이 직접 명법사 작은 절을 찾아 오셨어요. 그리고 1년간 무보시로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어요. 2000년 이후 도문큰스님의 유훈사업에 조그만 힘을 보태게 됐습니다.”

“2010년 도문큰스님께 강물이 끝나고 바다에 이르면 저는 앞으로 공기처럼, 소금처럼, 산소처럼 살겠다고 했어요. 없는 존재처럼 지내겠다는 뜻이었어요. 10억원에 이르는 기금을 불사하고 나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도문큰스님을 돕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저의 아상이었습니다. 제가 스님을 도운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역대 조사와 용성진종 조사께서, 상좌 동헌큰스님에서 도문큰스님까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 것이었어요. 통일을 위해, 일체중생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아빠처럼, 엄마처럼 중생을 어루만지셨던 거였어요.”

물심양면으로 도문큰스님을 돕던 화정스님에게 2014년 용성조사 유훈실현 회향식에서의 회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스님은 용성진종장학재단을 설립하고, 후학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화정스님은 “용성진종 조사께서는 현재의 한국불교 기초를 닦으신 분이면서, 민족의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라며 “앞으로 일반인과 청소년에게 용성조사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대각을 이뤄 깨달은 부처가 되라”는 용성진종조사의 큰 원력을 실현하는, 대승의 길이기 때문이다.

[불교신문3243호/2016년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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