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강원 개설 화엄종주  

道德仁義之法中王也

獸中麒百獸隨之

禽中鳳凰百禽之者

 

도덕과 인의로 법왕이다. 

짐승 가운데 기린으로 온갖 짐승들이 그를 따르고 

날짐승의 봉황으로 많은 날짐승이 그를 따른다. 

 

해붕전령(海鵬展翎, ?∼1826)스님이 상월새봉(霜月璽封, 1686~ 1767)스님을 위해 올린 경찬으로 <해붕집>에 실려 있다. 부휴선수의 후손인 해붕스님이 서산휴정의 6세손 상월스님을 찬탄하는 글을 지었던 것은 상월스님의 명성과도 관계있겠으나 무엇보다 두 스님이 출가하고 활동한 곳이 조계산 선암사라는 인연이 더 컸을 것이다. 

상월스님은 11세에 선암사의 극준(極俊)장로에게 출가하여 15세에 머리를 깎고 16세에 화악문신(華岳文信)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의 문하에 들어 의발을 전수받아 서산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저도안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했다. 이후 스님은 여러 산문의 선사들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은 후 1713년에 선암사에 돌아와 강원을 개설했다. 이에 많은 학인들이 상월스님께 배움을 청하기 위해 줄을 잇자 이를 본 무용수연(無用秀演)스님은 당대 최고 강백으로 이름이 높던 환성지안 이후 제1인자라는 칭송했다. 

스님은 특히 화엄에 정통하여 화엄종주(華嚴宗主)로 존경받았으며 1734년과 1754년에 선암사에서 두 차례의 화엄법회를 개최하자 학인과 선사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 해붕스님이 상월스님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우두머리이자 법왕이라 찬탄한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스님이 81세가 되던 해인 1748년에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가지만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水流元歸海 月落離天)”는 게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다비 후 스님의 유골을 받들어 묘향산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려 할 때 구슬같은 사리 3과가 출현하자 제자들은 이를 묘향산, 선암사, 대흥사에 모셨다. 

현재 선암사에는 상월스님의 승탑과 묘향산을 향해 서 있다는 전설이 어린 비(碑)가 세워져 있으며 그리고 진영이 전하고 있다. 본래 선암사에는 두 점의 상월스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한 점은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지금은 영찬이 없는 진영만이 남아 있다. 이 진영에는 중간키에 얼굴은 둥글고 큰 귀에 목소리는 우렁찼으며 소조상(塑造像)처럼 움직임이 없었다는 후손들의 전언(傳言)을 그대로 그린 듯 강건한 인상을 한 상월스님이 있다. 진영에 깃든 상월스님의 기세는 이후 세대를 넘어 전해져 해붕스님이 경찬을 짓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교신문3242호/2016년10월22일자] 

해제=정안스님 설명=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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