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지 않는 후불(後佛)…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생명나눔실천본부 이끌며 

소아암 백혈병어린이 지원 

장기이식 환자 돌보는 것은

생면부지 타인의 간 기증받아 

목숨 구한 것에 대한 ‘보은’

“인욕보살 칭송받던 지월스님

마지막을 곁에서 정성껏 지킨

공덕으로 중노릇 해온 것 같아…

울고 싶을 때 울고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세요 

출가자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지난 9월23일 남양주 불암사에서 만난 일면스님. 늘 상대를 ‘주불’로 대하며 ‘후불탱화’ 역할을 자처하는 스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른바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왠지 끌린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면(日面)스님은 간경변증(간경화) 말기를 이겨냈다. 2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기도 했다. 현재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본부를 이끌며 장기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을 돕고 있다. 소아암이나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의 치료비도 지원한다. 스스로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서 간을 선물받아 목숨을 건졌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는 일이다. 사실 보살행의 내용은 언론에 익히 알려진 바다. 그래서 예전부터 업적보다 내막이 더 궁금했다. 

1982년에 간경화 1기 판정을 받았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하는 체질이다. 조계사에서 재무와 총무 소임을 보던 중 일본 유학 기회를 얻어 종로의 일본어학원에 다녔다. “이유 없이 자꾸만 피곤하더라.” 그때만 해도 누구보다 저돌적이었고 누구보다 다혈질이었다. 쉬어야 한다던 의사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스님의 법호는 두산(斗山). 흙을 한 말씩 옮겨 산을 쌓으라던 법(法)스승 운허스님(학교법인 광동학원 설립자)의 격려가 담겼다. 중앙종회의원을 내리 연임하는 동시에 제3대 교육원장으로 광동학원 이사장으로… 무서울 만치 스스로를 일에 내몰았다. 1994년 종단개혁에도 가담했다. “종단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긍지가 눈을 가려, 예후(豫後)는 쉽게 잊었다. 1998년 기어이 사달이 났다. 무려 16년 동안 병을 키운 셈이다. 16번 병원에 입원했고 몇 번은 응급실로 실려 갔다. 

과로와 스트레스는 끈끈한 동업자 관계다. 서로가 사이좋게 양쪽 어깨를 붙잡고,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간다. 198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총무원장과의 갈등으로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남양주 흥국사 탱화 분실사건이 이즈음에 일어났다. 동국대 이사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주지였던 자기에게 반드시 보복이 오리라 싶어 도저히 총무원에 보고할 수가 없었다.” 업무에 쫓기고 증오에 쫓기면서, 어렵게 쌓은 산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렸다.

스님은 상반신 전체를 가로지르는 십자 모양의 수술자국을 보여줬다. 보편적으로 ‘간 수치’라 부르는 AST 지수가 8400까지 치솟기도 했다. 정상범위는 20~30. 복수(腹水)가 차고 혼수(昏睡)를 반복했다. “할 수 있다면 마약이라도 구해서 먹고 싶은” 크기의 고통이었다. 점점 말라갔고 까매졌다. 흉측하게 변한 몰골에 절친했던 도반들조차 등을 돌렸다. “1억원을 들여 극진히 병구완을 해줬던 스님이 같이 밥도 먹어주지 않더라.” 회복하기 요원할 만큼 바스러진 건강엔 극도의 배신감이 한 무더기로 얹혔다. 망가진 신체는 급기야 정신마저 부숴버렸다. 

우울증의 내용은 일견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지옥이다. 뇌기능 장애로 인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괴감 공포감 불안감 무력감… 가슴엔 무거운 불덩어리가 들어앉는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로 뇌가 인식하므로, 자살한다. ‘멘탈 붕괴’는 함부로 쓰면 안 되는 말이다. 방문을 잠그고 창문엔 두꺼운 커튼을 치고 하루종일 어떻게 죽을까만 생각했다. 약물의 도움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이라 알려져 있으나, 스님은 딱 한 알만 먹었다. “점잖은 소리는 혼자 다 했는데….” 명색이 마음을 닦고 남의 마음을 다스려준다는 출가수행자가 마음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나머지는 깡그리 불태워버렸다. 주변인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다짐으로 겨우 죽지 않고 버텼다.

다행히 간 이식은 성공했고 수술은 20시간이 걸렸다. 새 생명을 기다리던 앞서 네 명의 환자에게 안 맞던 간이, 스님에게 맞았다. 의식이 없던 와중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들으며 사후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수술 이후도 끔찍했다. 다시 살려면,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기력이 쇠진해 “화장실을 가는 길이 마치 태산을 오르는 길 같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손가락에 망치를 찧은 통증이 전신에 퍼지는 증후군마저 덤벼들었다. 그래도 운동해야 산다는 주치의의 강권에 온몸에 14개의 주사바늘을 꽂고 걸었다. 혼곤한 마음으로 문득 병실 창문으로 한강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저 강물, 저 강물 흘러가는 것 한 번 더 보려고 내가 사는 구나….’ 

지난해 스님은 10개월 만에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스님은 “행정이 정말 투명한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다 지난 일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온갖 비난과 공방과 저주가 난무했다. 공과(功過)를 넘어, 여하튼 억울했을 것이다. 할 말이 많은 듯 했던 스님은 금세 말을 흐렸다. “자신의 업(業)”으로 돌렸다. “불쑥불쑥 화가 나면 심호흡을 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불길을 빨리 잡을 수가 있어요. 신기합니다.” 

“너희는 주불(主佛) 해라. 나는 후불탱화 하련다.”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충고에, “나는 포교로 일가견을 이루겠다”며 당차게 내뱉은 말이다. 세간에선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젊은이들을 타이르나, ‘방향’보다 중요한 건 ‘원력’이라는 게 일면스님의 지론이다. 

“참선이든 계율이든 전법이든 복지든 출가할 때 자신만의 원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행자치고 끝까지 절에 남아있는 걸 본 적이 없다”며 “강건한 신념이 삶의 디딤돌이자 나침반”이라고 역설했다. 여전히 ‘할 수 없다’는 말을 제일 싫어하고 집념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인생이다. 그래도 이젠 만족을 안다. “빛나지 않는 후불(後佛)이었지만, 여하튼 한 분야를 비춰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해인사 ‘햇중’ 시절 ‘인욕보살’로 칭송받던 지월스님의 마지막을 곁에서 정성껏 지켰다. 지월스님이 입적하자 눈썹까지 밀어버리고 대중을 먹여 살리는 공양주를 자청하며 재(再)발심했다. 스님은 “행자 때 지은 그 공덕으로 지금까지 중노릇을 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때론 넘어지고 때론 무너졌지만 기어이 살아남았다. 어쩌면 믿음이 살렸고 ‘좀 더 살아보라’는 부처님의 계시가 살렸다. 막장과 같던 수술실, “잠결인지 죽음의 문턱인지에서 들려오던 그 염불소리는, <천수경>을 공책에 한 가득 베껴 쓰면서 또는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려가며 익혔던 염불소리의 윤회일 것”이라고. 

일면스님은 올해 일흔이다. 누구보다 정열적이었으나 그만큼 가혹했던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 애당초 불암산을 오르면서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에, 스님은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젊은 남녀가 백주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뽀뽀를 해도 저는 뭐라 하지 않아요. 세상의 유행을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 이상의 행복이 있을까요. 울고 싶을 때 울고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세요. 출가자가 아니라면 다 괜찮습니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주는 것. 길고 깊었던 고통 속에서 얻어낸, 단출하지만 단단한 지혜다. 

■  일면스님은…  

1959년 명허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1964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9년 동국대 불교대학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조계종 제9·10·11·12·13대 중앙종회의원과 제3대 교육원장을 지냈다. 아울러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 초대 군종특별교구장, 호계원장, 제38대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 종단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다. 현재 학교법인 광동학원 이사장이자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이다. 2013년 만해대상을 수상했다. 

[불교신문3242호/2016년10월22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