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선종의 적전자

性鏡元無竟 성품의 거울은 원래 다함이 없고 

心秤本自平 마음의 저울은 본래 평평하다. 

頭頭皆現露 두두(頭頭) 모두 다 드러나 있으며 

物物揔圓明 물물(物物) 모두 다 둥글고 밝다.

戒弟子毋藏骨留影 수계 제자들아! 

유골을 감추고 그림자도 남김이 없게 하라.

 

1737년 가을 7월10일 저녁 비슬산 유가사의 낙암의눌(洛巖義吶, 1666~1737)스님은 임종을 앞두고 향탕(香湯)에 목욕하고 손수 붓을 들어 게송(偈訟)을 남겼다. 이 임종게는 스님의 벗인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지은 <낙암대사비명(洛巖大師碑銘)>(1752)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한다.

구미 해평 출신인 낙암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대곡사 천곡(天谷)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황악산 직지사의 모운진언(暮雲震彦)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 28세에는 양평 용문산에 주석하는 상봉정원(霜峰淨源)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서산휴정에서 편양언기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했다. 제자 해봉스님은 낙암스님에게 바치는 제문(祭文)에서 “부처님이 사라쌍수에서 발을 보이시고 달마가 소실(小室)에서 의발을 전수하니, 조계의 일미(一味) 임제로 흘러들어 넘실대고 석옥(石屋)의 등불 하나 우리나라에 비춰 찬란하네, 서산의 돌부(?斧)가 네 번 전해 선사에 이르렀다네!”라며 스승이 계승한 선맥의 연원을 밝혔다. 이처럼 당시 불교계는 낙암스님을 선종의 적전자(嫡傳者)로 인식했고 이는 스님의 비(碑)와 진영에 조계종대사(曹溪宗大師), 임제종화상(臨濟宗和尙)이란 칭호로 고스란히 표현됐다.

낙암스님은 세상의 명성에 구애받지 않고 중도를 중시하며 행동과 말로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했다. 이런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체보다 성(性)과 심(心)에 매진하라는 게송을 남겼으나 불연(佛緣)을 잊지 못하는 제자들은 스승이 입적하고 얼마 후 유가사에 승탑을 세우고 스승과 인연이 깊었던 유가사, 용연사, 해인사 등에 진영을 모셨다.

낙암스님의 진영이 모셔진 사찰 중 현재 진영이 남아있는 곳은 해인사뿐이다. 해인사 진영 속 낙암스님은 질박하면서도 자재(自在)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비록 유훈을 따르지 않고 진영을 제작하였으나 그 뒷면에 적힌 스승의 기일과 진영 봉안처 그리고 영답(影畓)에는 이렇게 해서라도 스님과의 인연을 후세까지 잇고자 제자들의 바람과 정성이 담겨 있다.

[불교신문3236호/2016년10월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