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승가대학원장 일초스님

 

19일부터 매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2시 강설전 원각경 특강 

 

원전 강독하며 ‘한문의 맛’ 만끽 

불교공부는 ‘개념’ 아닌 ‘감동’ 지향 

 

40여년 가르친 비구니 ‘대강백’ 

폐사 가까웠던 동학사 ‘명찰’로 

 

씨앗 심지 않고 열매 얻을 수 있나

‘행복’과 ‘편리’ 혼동하면 늘 목말라

지난 9월21일 공주 동학사에서 만난 일초스님. 스님은 “ 하루아침에 거목이 되는 나무는 없다”며 “언제나 깊이 생각하고 매사에 성심을 다하며 지혜를 다지라”고 당부했다.이시영 충청지사장 lsy@ibulgyo.com

인터뷰를 마칠 무렵 기념촬영을 할 장소를 물색했다. 전각도 수려했고 오솔길도 포근했으나, 계룡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문필봉을 골랐다. 말씀을 다 듣고 나니 일초(一超)스님은 큰 산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문적 식견도 강백으로서의 자부심도 무엇보다 넓고 길게 볼 줄 아는 포용력도, 고봉준령에 필적했다. 지혜는 시간의 힘이자 견딤의 몫이란 걸 새삼 실감했다.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사집반 때 동학사 재무를 맡았다. 말하자면 대학교 2학년 학생이 재무처장에 임명된 격이다. 1966년의 일이다. 지금이야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명찰이지만, 그때만 해도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폐사(廢寺) 수준이었다. 막대한 빚 때문에 어른들은 모두 종적을 감췄고, 선배들도 지청구를 씹으며 보따리를 쌌다. 누군가는 떠안아야 했다.

버려진 절에 잔류한 학인들은 일초스님을 ‘왕언니’로 옹립했다. 유식학(唯識學)의 달인이었던 호경스님을 강주(講主)로 모시기 위해, 후배들 24명을 데리고 남양주 흥국사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새 주지 스님은 ‘네가 사실상 주지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며 일초스님의 영입 제안을 들어줬다. 아침에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장을 보러 나섰다. 절에 돌아오면 저녁 9시가 넘었다. 행여 동생들의 잠을 깨울까 일주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모두가 자고 있는 10시나 돼서야 절 안으로 들어왔다. 위궤양으로 입원하기까지 그렇게 2년을 버텼다. 하기야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종각불사까지 마쳤으니 그만 해도 됐다.

어릴 적부터 식구들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먹여 살렸다. 1980년 동학사 승가대학장에 부임한 일초스님의 교육경력은 40년을 헤아린다. 오는 19일부터 1년간 매월 셋째 주 수요일 오후 2시 동학사 강설전에서 <원각경> 특강을 연다. 동문과 전체 비구니 스님들의 안목을 높여주려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공부하면서 간경(看經)의 참맛을 새삼 느껴볼 생각입니다.” 말투는 얼핏 곱상하지만 굵은 알이 박혔다. 마치 짜릿한 묘수를 두고는 쩔쩔매는 상대를 느긋이 바라보는 고수의 기품이랄까.

특강은 한문원전 강독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불교의 대중화를 취지로 의례의 한글화가 종단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충분히 튼튼한 명분이지만, 경학(經學)의 대가들은 한문교육의 묘미를 말한다. 일초스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함축적인 한자로 구성된 경전 구절은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그야말로 창조적인 사고의 보고(寶庫)입니다. 무수히 많은 글자를 외워야 하고 복잡한 문장구조도 고역이지만, 그만큼 보람이 크기 마련이지요.”

일례로 든 글줄은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건 쉴 새 없이 중생을 위해 마음을 쓰라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내어 복을 지어야만 진정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할 때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법입니다. 화엄(華嚴)이란 어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극락세계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노력이 ‘화’라면 노력의 결과가 ‘엄’이에요. 단지 망상의 잡초를 뽑는 게 소승의 불교라면 빈 밭에 곡식을 심는 것이 대승의 불교입니다. 휑한 밭이 자기만족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생을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밭을 갈아야지요.”

개념만 공부하면 쉽다. 시험을 치는 데에도 유리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교인의 공부라 말할 수 없다”는 게 일초스님의 지론이다. 경전에서 감동을 얻어내야만 진정한 학업이 되고 선업(善業)으로 쌓인다. 스님은 가슴 깊이 묻어두고 들춰본다는 <화엄경> ‘십회향품’을 들려주었다. 눈을 달라고 하자 눈을 빼주고 손발을 달라 하자 손발을 떼어주고 살가죽까지 다 넘겨주고는, 그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했다는 어느 임금의 극단적 보살행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고서 하는 말이 압권이다. ‘당신은 내가 복을 지을 기회를 준 대선지식이요.’

우리는 자비를 너무 쉽게들 말한다. 증오가, 애종심이란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해박한들 이런 자비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행복과 편리를 혼동하고 있어요. 돈과 명예를 거머쥐면 행복하지만,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지키려고 전전긍긍하면 그것만큼 혹독한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행복은 완전한 불행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자유를 성취할 때까지는 공부를 마쳤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현재 동학사승가대학장은 보련스님이다. 일본에서 10년을 유학한, 일초스님의 전강(傳講) 제자다. 일초스님을 보좌하며 불림 범견 문성스님 등의 교수와 함께 학인들을 지도한다. 보련스님은 “‘경쟁’과 ‘배타’가 아닌 ‘협동’과 ‘배려’가 동학사승가대학의 교육이념”이라며 “대학원장 스님의 평생에 걸친 원력 덕분에 우리가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다”고 존경을 표했다. 동학사 경내를 거닐며 또는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이좋은 모녀이자 자매였다.

일초스님의 법호는 2개다. 전강을 받을 때의 경월(鏡月) 그리고 손수 지은 금화(金華). 금화란 최고의 지혜를 얻은 수행자들이 뛰어노는 동산을 가리킨다. 대전에 창건한 금화사의 주지이기도 하다. 평생을 경학 연찬(硏鑽)으로 일관한 스님의 긍지가 엿보인다. 물론 모진 가난 속에서도 스스로 힘쓰며 대중을 돌봐온 이력 때문에,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진속일여(眞俗一如)’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2년간 무문관을 하기도 한 정직한 인생이다.

그리하여 정진은 ‘기다림’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 내놓아도 창피하지 않을 만큼 영글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거목이 되는 나무가 있습니까. 씨앗은 심지 않고 열매만 맛보려 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요. 남을 괴롭히지 않고, 묵묵히 시련을 감당하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그러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러면 반드시 지혜가 생깁니다. 정상이 탐나시나요? 발밑만 보고 걸으세요.”

계룡산 문필봉 앞에 선 일초스님.

■ 일초스님은… 

1963년 광주 신광사로 출가해 경인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4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68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965년 동학사 승가대학에 입학해 1971년 대교과까지 마쳤다. 1980년 동학사승가대학 학장에 부임해 현재 동학사 화엄승가대학원장을 맡기까지 40년 가까이 스님들을 가르쳤다. 동학사 주지, 제14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고시위원, 중앙선거관리위원을 역임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경전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불교신문3236호/2016년10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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