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불기 2562 (2018).4.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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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발밑부터 먼저 살피라스님들을 비판하고 싶다면 ‘윤리적으로 우위에 서야’
조계종 국제교류위원회 위원인 김종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가 최근 본지에 스님들을 비판하고 싶다면이라는 주제의 기고문을 보내왔다김 교수는 문제 있는 스님에 대한 비판보다는 청정한 스님들을 후원하고불교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실현하는 앞장서 주길 바란다며 사회적 엘리트 불자들의 인식전환을 촉구했다김 교수 기고문 전문을 게재한다.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있고, 그로 인해 불평불만이 생기고, 또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소란과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능하면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고, 소란과 소동 없이 문제들이 해결되어 간다면 좋겠지만, 욕망과 이익이 충돌하는 중생들이 모여 있는 사회와 집단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욕망과 이익의 크기가 클수록, 또 중생들이 그것을 조절하는 수준이 높으면 불평불만, 소란과 소동이 덜하고, 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더하다.

불교계는 안타깝게도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소란과 소동이 심한 곳이다. 그만큼 충돌하는 이익과 욕망의 크기가 크거나 불교인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불교계는 사실 그렇게 커다란 욕망과 이익이 생길 만한 곳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욕망과 이익이 돈으로 환산되어 나타나는데 불교계는 풍문으로 과장된 것처럼 그렇게 돈이 많은 곳이 아니다. 불교계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가난한지는 이웃 종교들의 경제적 수준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계가 소란스런 것은 중생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불교계에는 사부대중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교계는 스님들의 수준이 낮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시끄럽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과거에는 스님들의 불미스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이권 때문에 사찰과 총무원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들도 자주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여전히 불미스런 일들을 저지르는 스님들이 있으나, 스님들의 수준은 여러 면에서 향상되었다. 그런데도 불평불만의 소리, 소란과 소동이 과거보다 더 심한 것은 왜인가? 필자는 이제 그 이유를 재가 불자들에게서도 찾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간 스님들의 문제에 묻혀서 재가불자들은 온전히 피해자로만 보아왔는데, 이제는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재가 불자들, 그 중에서도 세속적 지식수준이 높은 사회적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제기해 보고 싶다.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세속적 지식수준이 높은 재가불자들은 불교계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헌 보다는 의도치 않는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쓰임새도 많고 영향력도 높다. 자신의 전문적 기능이나 보편적인 지적능력으로 보통의 사람들에 비해 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능력과 역할은 포교를 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불교 발전을 위한 소중한 자원들이다. 이들은 전문기능을 활용한 봉사단체를 만들어 포교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기능이나 사회적 위치를 활용해 불교계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또 직접적인 포교에 나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불교를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교계의 사회적 엘리트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활동들을 통하여 불교의 발전을 도모하는 이들의 모습보다는, 불교계의 잘못에 대한 비판활동에 골몰하는 이들의 모습이 압도적으로 두드러진다. 불교계의 사회적 엘리트들은 불교계 특히 조계종의 스님들과 관련하여 모든 일들에 대해 비판적일 뿐 아니라, 그 비판의 도가 한도를 넘어서는 경우들도 나타나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이 비판하는 것이 대부분 사실이며, 또 일리가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스님들을 보면 불교인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생각해 보면 스님들 일반이 재가불자들로부터 그렇게 비판 받아야 마땅하며, 또 이들이 이렇게 비판할 위치에 있거나 자격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스님들이 윤리적 비난을 받게 되는 근본 원인은
스님들의 윤리적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수준이 이처럼 높은 데 있다
 
먼저 왜 스님들 일반이 비판 받아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들 재가불자들은 스님들, 특히 조계종 스님에 대해 다양한 비판을 하는데 비판의 기본적인 성격은 파계와 일탈, 사치 등에 관련된 윤리적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파계, 일탈, 사치를 하는 스님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스님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면 더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도 인간인 이상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들은 부처님이 생존해 계시든 때에도 수없이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계율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불교의 계율, 특히 스님들의 계율은 세속의 일반적인 도덕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어서, 인간의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 비추어보면 비현실적으로 비칠 정도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종종 스님들의 계율을 현실화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오늘날 스님들이 윤리적 비난을 받게 되는 근본 원인은 스님들의 윤리적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수준이 이처럼 높은 데 있다. 나는 스님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이른바 매너가 세련되지 못한 경우는 많이 있으나 평균적 윤리 수준은 훨씬 높으며,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보다 높다고 본다. 사람들마다 윤리관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의 자원을 소모하거나, 다른 생명체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가 하는 것을 윤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기준에서 보면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서 독신생활을 하는 스님들은 일반인들이 따라 갈 수 없는 윤리적 수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독신 생활의 윤리성은 인정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스님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웬만큼 사치스런 스님들의 생활비조차도 일반 가정의 부부의 생활비의 반도 안 된다. 그만치 세상의 자원을 소모하거나 다른 생명체에 피해를 주는 양이 적은 것이다. 나의 월급은 사회적 평균에 못 미치는 정도이지만, 만약 내가 독신이어서 혼자서 이 월급을 다 쓰면서 산다면 사치스런 삶을 산다고 비난 받는 스님들보다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을 위해 불가피하게 비용을 쓰는 것과 자신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비용을 쓰는 것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지출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이것을 비난하지는 않는 것이 윤리적 상식이다. 자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라고 여긴다. 그래서 옛날 유학자들은 출가한 승려들은 가정을 버리고 임금을 버린 극단적 이기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비판은 가족을 소우주로 여기는 이들의 궤변에 불과하다.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자식을 위한 헌신 역시 어디까지나 자식에 대한 자기 욕심의 발로이고, 요즘 유행하는 진화생물학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의 유전자를 전하기 위한 이기적 유전자의 활동이다. 세상을 위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자식을 키우는 부모를 본 적이 있던가? 그런 부모는 신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정을 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것은 비난 받아야 할 일은 아니지만 굳이 칭찬받아야 할 일도 아니다. 가정을 버리고 여유로운 독신생활을 할 것인지, 가정 속에서 부대끼면서 살 것인지는 가치중립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혼자서 호화롭게 살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비난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윤리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대신 독신으로 살면서 여유로운 삶을 사는 여피족을 비난하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이것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전근대적 사고에 찌들어 있는 못난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 여피족들에 비해 훨씬 덜 사치스럽고, 여러 가지 제약도 많은 불편한 삶을 사는 스님들에 대해서 재가 불자들은 왜 비난을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여피족들은 자신이 노동해서 번 돈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반면에 스님들은 신도들이 보시한 돈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타당한 생각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스님들 역시 자신들의 노력의 대가로 보시를 받는 것이다. 다만 주고받는 형태가 일반 사회에서의 정확한 거래관계와 다를 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고도의 윤리적 지침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스님이란 이유로 비판할 수는 없다
 
여피족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스님들을 비난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님들에게 보시를 하는 것은 단지 노력에 대한 대가뿐 아니라 스님다운 삶, 스님들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윤리 기준에 부합하는 삶에 대한 기대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가치가 소멸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치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실망은 되겠지만,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강제로 불교인이 된 것도 아니고, 불교가 국교여서 불가피하게 불교인이 된 것도 아니다. 보시 또한 본인 스스로 한 것이지 강요당해서 한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들이 신도들로 하여금 돈을 내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하지만, 이 점에서도 불교는 매우 점잖다. 신도 한 사람당 종교단체에 내는 돈을 따지면 불교가 제일 액수가 적을 것이다. 절은 아마도 수입이 없는 노인들이 가장 편하게 가서 기도할 수 있는 종교시설일 것이다.
 
강요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스님다운 삶을 살 것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보시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스님들에게만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치를 말하는 정치인, 교수, 교사, 언론인, 문화인, 예술인 등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기 당하는 돈의 액수를 따지면 스님들에게 당하는 액수가 제일 적을 것이다.

나는 스님들이 스님다운 삶을 살지 않더라도 계속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스님다운 삶을 사는 스님들에게도 보시를 하라고 권유하지도 않는다. 보시는 내가 여유가 있으면 하는 것이고, 내가 보시하는 것이 기쁘면 하는 것이다. 나는 스님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는다. 스님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전근대적인 몽매함이다. 존경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특정집단의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현대사회에는 인격적으로 더 높은 집단이나 더 낮은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다. 스님들은 우리를 위해 윤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님들을 존경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해탈을 위해서 독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이상은 어느 모로 보나 고귀한 것이고, 그런 면에서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진정 훌륭한 이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은 존경 받을 만하다.

그러면 스님답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님이 스님답지 못하면 비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님답기 위해서는 일반인이 실천할 수 없는 고도의 윤리적 지침인 계율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를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고도의 윤리적 지침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스님이란 이유로 비판할 수는 없다. 윤리적 비판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이거나 최소한 상호적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님답지 못한 것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 스님들의 모든 행위에 윤리적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스님들도 스님답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불자답지 못하거나 인간답지 못한 경우에는 비판할 수 있는 일이다. 스님답지 못함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그 스님답지 못함이 단지 스님답지 못함인지, 불자답지 못함인지, 인간답지 못함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스님다운 것이고 불자다운 것인지는 모호할 수는 있지만, 상당히 유명무실화되기도 했지만 비구계와 보살계의 준수가 기본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님들의 수준이 많이 향상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스님들이 스님답지 못한 행위를 상습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스님답지 못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스님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스님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승가를 위해서도, 불교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승복을 벗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사회 일반의 윤리 기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또 일반 불자들도 흔히 하는 행위라면 재가불자들이 비판에 나설 일은 아니다. 그들과 동일한 윤리적 지침을 가지고 실천하고 있는 스님들이 비판하고 제재를 가하고, 심한 경우에는 승단을 떠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승단의 일은 승단에 맡겨야 하겠지만 승단이 자정기능을 상실했다면 재가불자들이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승단의 자정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훨씬 낮은 윤리적 기준을 가진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을 비판하러 나서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승단의 자정기능이 재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승단을 부정하고 승단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는 있어도, 재가불자가 나선다고 해서 자정기능을 상실하여 더 이상 승단이 아닌 집단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우리가 사부대중이라고 하고, 승단과 재가자는 서로 의지하지만, 승단이 재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재가자가 승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간에 상호 협력적 관계가 존재하지만 그 관계는 윤리적 의무관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승려로서 살 테니 당신들은 우리들에게 보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듯이, 우리들은 보시할 테니 당신들은 계율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주장은 전근대의 신분제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스님이 스님답지 않고, 승단이 승단답지 않다면 재가자들은 그 스님과 승단과의 관계를 청산하면 그만이다.
 
스님들의 일탈을 비판하는 재가불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의 비판이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비판하는 이들의 위치와 자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비판의식이 매우 낮다. 스님들의 도덕적 일탈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스님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재가불자들은 주로 사회적 엘리트 계층들이다.
 
대다수 불자들과 달리 이들이 스님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유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은 지적 수준이 높아서 도덕적 일탈을 포함한 스님들의 문제점들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점들을 개선하려는 의지도 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이 엘리트계층 재가불자들의 스님들에 대한 비판이다.

스님들의 일탈을 비판하는 재가불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의 비판이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 것은 이들에 대한 스님들의 각별할 대우이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 엘리트라는 이유로 종단 차원, 사찰 차원, 혹은 개인 차원에서 스님들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재가불자들을 안하무인의 태도로 대하는 스님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사회적 엘리트 계층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융숭한 대우를 한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교계에 사회적 엘리트층이 얕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문적 역량이 불교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지면 행사나 회의에 초대하여 후한 여비를 주기도 하고, 후한 식사 대접을 하기도 한다. 특별히 전문적 역량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엘리트 불자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는다. 한마디로 귀한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이다.
 
사실 스님들의 손님 대접은 과한 것이 사실이다. 사회적 평균에 비해서도 그렇고 스님 본인이나, 스님 본인이 속해 있는 사찰이나 종단의 형편에 비해서는 더욱 과하다. 스님들, 특히 나이든 스님들의 복지가 안 되는 상황, 또 개별 사찰에서 일하는 재가종무원들의 열악한 처우에 비교해 보면 사회적 엘리트들에 대한 스님들의 대접은 매우 과하다. 그런데 스님들의 이러한 대접을 받은 사회적 엘리트들이 두 가지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스님들 일반이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접받는 본인이 대접받는 스님들보다 훌륭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스님들의 융숭한 대접문화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전통문화에 갇혀 있는 스님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회의 허례허식 문화를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내일부터 자식들의 배를 굶길 처지에 있어도 귀한 손님이 오면 고기반찬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였다. 사실 스님들 일반의 일상적인 생활은 검박하다.
 
사회적 엘리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는 스님들도 본인의 사찰에서는 검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스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본사 주지스님들도 사찰 내에서는 대중생활을 한다. 사찰이라는 공간은 기본 구조상 일반 스님들은 검박한 수도생활을 하라고 하고서 본사 주지 혼자서 아방궁에서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의 재정은 모든 스님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제공할 만큼 재정이 튼튼하지 못하다.

알고 보면 중 생활이란 것이 쉬운 것이 아니고,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활해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맛없는 음식만 먹고 사는 것이 중 생활이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지만 한 때 절에서 생활할 때는 새벽예불 때문에라도 절을 떠나고 싶었다.
 
특히 추운 겨울철 산간에서 새벽예불을 보기 위해 냉기 가득한 법당으로 향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얼마나 타락한 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큰 절에서 주지하는 스님들은 모두 이러한 절 생활을 몇 십 년씩 한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이다. 물론 과거의 검박한 생활태도를 잊고, 사치에 빠지고, 재산을 빼돌리는 이들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소수이다.

반면에 스님들을 비판하는 사회적 엘리트들은 호사스런 생활을 해왔고 앞으로도 호사스럽게 살아갈 사람들이다. 내가 호사스럽다고 하는 것은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비싼 외제차를 타고, 골프를 치고, 값비싼 식당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과 실직자로 가득 찬 사회에서 좋은 직장에서 많은 임금을 받고 사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럽게 사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반성부터 할 일이다. 본인이 특권을 누릴 만큼 훌륭한 능력과 도덕적 자질을 갖추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사회적으로 혜택 받은 환경에서 태어난 덕분에 처음부터 남들보다 앞서 있었거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얻기 위해 누군가에게 아부했거나, 뒷배경을 활용했거나, 자기의 능력을 지나치게 포장을 했거나 한 적이 없었는지,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에게 특권을 제공하는 직장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볼 일이다. 그 직장은 내부적으로 갑질 하는 사람과 갑질 당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닌지, 또 자신은 갑질 하는 입장이 아닌지. 그리고 직장 자체가 사회적 갑질을 하는 조직은 아닌지 살펴 볼 일이다. 그러고도 문제가 없다면 사회의 거대 악에 대한 비판에 나설 일이다.
 
우리 사회는 노골적으로 도덕과 양심을 비웃는 거대악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가. 이런 거대악에 대해서는 모른 채 하면서,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도덕적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설정해 놓은 매우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 허점을 드러낸 사람들을 비판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온종일 빈둥거리며 노는 자신의 친딸들은 내버려두고 열심히 일했지만 자신에게 부과된 일을 다 할 수 없었던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계모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불교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임을 안다. 여전히 스님들 중에는 극도로 타락한 스님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승단의 자정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윤리적 비판은 사실에 대한 비판과 다르다. 윤리적 비판은 종합적인 측면에서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서울에서 남편의 부정한 돈으로 여유롭게 살면서 자기과시를 위해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인 손아래 동서가, 시골에서 궁핍하게 살면서도 분에 넘치게 사치스런 면이 있는 손위 동서를 비판한다면 그것이 적절한 태도이겠는가? 그 집안의 꼴은 또 어떻게 되겠는가? 양쪽의 실상을 다 아는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들으면 그들은 이 집안을 어떻게 보겠는가?

내가 보고 느낀 바로는 승단에는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다른 어떤 곳보다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위계질서도 가장 덜하고, 그에 따른 월급 차이도 거의 없고,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에 대한 착취도 없지 않은가? 주지직을 두고 다투기도 하지만 승진을 위한 치열한 경쟁도 없는 곳이 아니든가? 스님들이 갑질한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대부분 갑질하는 조직 속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된 경쟁의 승리자들이다.
 
과연 출가한 스님들의 조직을 비판할 만한 도덕성을 갖춘 집단 출신의 엘리트들이 과연 한국사회에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보도 능력을 갖춘 언론기관은 많지만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갖춘 언론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으며, 기능을 가르칠 능력을 갖춘 대학들은 있지만, 양심 있는 지식인을 내세울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대학은 한 곳도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진정한 재가불자의 길은
문제가 있는 스님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청정한 스님들을 후원하고,
불교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사회적 엘리트들이 불심 깊은 재가불자로서 뭔가를 하고 싶으면 긍정적인 일로 나서기를 권하고 싶다. 타락한 스님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청정한 스님들을 후원하고 따르기를 권하고 싶다. 승단에 청정한 스님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잿밥에 관심 없이 살다 보니 가난하고 승단에서 실권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더러 타락하기도 한 실권을 가진 스님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세력을 규합해서 비판에 나서기도 어렵다고 한다. 재가불자들이 조직적으로 힘을 모아서 이들 청정한 스님들을 후원한다면, 이분들이 승단을 정화해 낼 것이다.
 
사실 승단에서 분쟁이 나고, 일부 타락한 스님들이 나오는 근본 이유는 불교계에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재정이 튼튼하지 못해서이다. 곳곳에 훌륭한 사찰건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사찰 재정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건립된 것들이다. 스님들이 살아가는 데 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냐고 할 수 있겠으나, 스님들이라고 조선시대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의식 수준이 천박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남루한 옷을 입고,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이가 몇 개 빠지고, 얼굴에 궁기가 흐르는 가난한 나라의 스님들을 보면 훌륭한 스님이라기보다는 빈민계층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봉암사는 순수하게 수행만하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한국불교의 성지다. 그런데 이곳 스님들에게조차 제대로 후원이 안 이루어진다. 종단의 특별지원이 없으면 봉암사는 살림을 꾸릴 수 없다. 그만큼 한국 불자들은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한 지원에 무심하다. 최소한 봉암사만이라도 재가자들의 후원으로 독립이 된 연후에야 종단의 자정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스님들 개인에게 필요한 비용만 지원할 일이 아니다. 불교계는 스님들이 문화재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에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가능하게 된 문화사업 외에는 사회적 공헌을 할 수 있는 사업을 거의 할 수가 없다. 복지사업도 그렇고, 교육사업도 그렇다. 절에 돈이 많은데 스님들이 사치스런 생활로 탕진해서 이런 사업에 쓸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나마 스님들이 기도해서 번 돈 외에 불자들이 순수하게 스님들의 수행을 위해 보시한 돈이 일년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돈만 받아서 생활해야 한다면 스님들 태반은 아사하고 말 것이다.
 
미약하나마 불교에서 복지사업, 교육사업을 하는 데 쓰는 돈도 스님들이 49재를 지내고, 각종 소원성취 기도를 지낸 대가로 받은 돈의 일부가 아니던가. 불교의 사회공헌을 요구하는 재가불자들은 많지만, 정작 본인들 스스로 여기에 나서는 불자들을 찾기 힘들고, 스님들의 사회공헌 사업을 후원하는 불자들도 드물다.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앞서서 나설 일이다.
 
재정적 후원을 할 입장이 아니라면 청정한 스님들을 조직적으로 찾아내어 사회에 알리고, 찾아가서 그들의 삶을 배우는 모임을 만들어 그들이 힘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현재 출가자의 수는 비구와 비구니를 합쳐서 15000명이 안 된다. 한 명, 한 명 청정한 스님을 찾아내어 명단을 작성해 인터넷에 올리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명단에 든 스님들을 불자들이 찾게 될 것이고, 자연히 이 명단에 들지 못한 스님들은 부끄러워 참회하든지 점차 도태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직접 포교에 나서는 일이다. 불교 신도들 대부분이 연로한 보살들이고, 갈수록 신도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스님들을 비판하는 엘리트 재가불자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다. 불교인들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떠들어댈 필요도 없다. 어떻게 극복할지 대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한데,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이 모든 책임을 스님들의 무능과 부패로 돌리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다.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불자들, 특히 엘리트 재가불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스스로 삶의 모범을 보이고, 자선을 베풀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데리고 법회에 참석하면 좋을 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산악회라도 만들어서 휴일에 산행을 하면서 도중에 절에 들러서 그들에게 불교이야기, 절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불교에 가까워지게 하고, 그래서 인연이 되면 절에 머무는 스님을 방문하여 차도 마시면서 불자가 되게 하면 좋지 않겠는가?
 
더러 스님들의 법문이 수준이 낮고, 사찰의 구조가 현대인들에게 불편해서 그러지 못한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인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십시일반 사재를 들여서 법당을 하나 만들면 될 일이다. 본인들의 훌륭한 지식과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그런 법당을 운영하면 신도들이 많이 오지 않겠는가.

재가불자들이 얼마나 비판적인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활동을 통해서 불교를 위하는 노력들이 부족한지는 기독교의 신도들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목사들이 훌륭해서 기독교가 급성장한 것이 아니다.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친지, 친구, 동료들에게 열심히 포교한 까닭에 급성장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기독교 봉사단체, 복지기관, 교육기관을 목사들이 세운 것이 아니다. 집사들,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 정신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런 사업에 나서는 불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기독교의 외형적 성장을 좋게만 볼일은 아니지만,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일요일 교회 앞을 지나가면 어깨띠를 맨 남자 신도들이 차량정리에 열심이다. 사회에서 잘 나가는 남자들도 순서가 되면 이 일을 기꺼이 한다고 한다. 엘리트 불자들 가운데 이런 일을 해 본 사람들이 있을까? 연등회 재등행렬에라도 다수불자들과 섞여 행진해 본 엘리트 불자가 있을까 싶다.

스님들의 도덕적 일탈을 비판하는 한국의 엘리트 불자들의 불심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승복을 벗어야 할 스님들이 상당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재가불자의 길은 문제가 있는 스님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청정한 스님들을 후원하고, 불교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럴 때 승단이 바로 서고, 불교가 대외적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김종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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