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알고 지낸 집사람마저도

깜짝 놀랄 풍경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수십 년 함께 산 부모님 역시

전혀 상상 못할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가슴 쓰리게 느낀다

 

명절이라 일가친척이 모여 낮술도 한잔하고, 서로 격의 없는 말들이 오갔다. 그중에 나이는 먹어가는 데 아직 결혼 못한 동생, 취직 못한 조카들에 대한 평가가 위태하게 들렸다. “누구는 내성적이라 결혼을 못 하고 있다.” “누구는 너무 겁이 없이 나대서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누구는 숫기가 없어 면접에 자꾸 떨어진다.” 한 사람에 대한 참 위험한 단언이자,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한 사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 동네 뒷산도, 올라가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흔한 ‘동네 산’일 뿐이다. 산 밑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산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매일 그 산을 올라가 본 사람은 안다. 단 하루도 산의 풍경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매일의 햇살이 다르고, 떨어져 있는 열매가 다르며, 산에서 사는 생명들의 몸짓이 다르다. 늘 처음 보는 것처럼 나날이 설레고 벅차다. 그렇기에 그 산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최소한 그 산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산의 아주 사소한 풍경마저도 첫 마음의 눈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30년을 알고 지낸 집사람마저도 깜짝 놀랄 풍경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적잖이 당혹스럽고 놀라운 모습을 발견한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모님 역시 전혀 엉뚱한, 상상 못 할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가슴 쓰리게 느낀다.

과거의 기억 또한 얼마나 편의적인 자기 해석인지,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믿을 수 없는 뇌의 작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도 기억은 자기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늘 재구성된다.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자기 이기적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허망한 그림자다. 그래서 기억을 두고 입씨름하는 것은 허공 꽃을 보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어리석은 몸짓에 불과하다.

초·중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그들은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다. “넌 옷을 잘 입고 다녀서 부잣집 아들이라고 생각했다”거나 “소풍 때면 뱀 장수 흉내를 기막히게 잘 내서 개그맨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억을 더듬는다. 중학교 때도 사실은 도벽이 있는 친구와 어울렸던 관계로 학교 징계를 받아 한동안 수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충격으로 중학교 시절을 내내 우울하게 보냈다.

하지만 동창들의 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마다 달랐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칙칙했던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선생님이 한마디 하시면 필자는 두 마디를 할 정도로 쾌활한 학교생활을 했다. 대학에 가서는 다시 진지한 성격으로 변해, 1970년대 우울한 작가 흉내를 내며 객기를 부렸다. 그 어느 시절도 고정된 내 성격이라 할 수 없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알 수 없음’이라고 답해주고 싶다. 사람이 한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고, 몇 마디 말로 규정짓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을 것이다.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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