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①

나와 남의 행복을 위해 수행하는 불자

깊은 대비심 등 ‘열다섯 가지 뜻’ 담겨

<대지도론> 제29권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보살의 집에 태어나고 싶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아시다시피 <대지도론>은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경)>에 대한 해설서이니 반야와 공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반야라고 하는 지혜를 갖추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해야 하며, 왜 반야바라밀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여러분이 “난 그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고 이번 생을 조용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만 품고 계신다면 이 <대지도론>에서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지도론>은 부처가 되고 싶고, 그래서 보살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심한 구도자를 위한 해설서이기 때문입니다.

보살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보살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을 뜻하며, 그는 이미 부처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고 장차 부처가 될 것이 결정돼 있다는 말도 됩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이 퍼져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상류층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말을 어린 자녀들에게 서슴지 않고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이미 빛이 바랜 신분제도가 오히려 더 득세하는 것 같아서 이런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착잡해집니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사람의 귀천이 출생으로 정해지는 것이 얼마나 근거없는 일인지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귀천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나름의 기준을 두고서 사람들을 바라보셨으니 그 기준이란 바로 그 사람이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오계를 잘 지키며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선업을 짓고, 오계를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가치있는 사람이며 누구나 선망하는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는 ‘보살’이라 불린다고 해도 좋습니다. 대승불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업을 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수행하는 불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살로 살아가는 것을 <대지도론> 제29권에서는 “보살의 집에 태어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살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에는 열다섯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그 하나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보살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은, 첫째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 사이에서 깊고 깊은 대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명들을 향해 아주 깊은 연민을 품는 것이 바로 보살의 집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깊은 대비심을 품는다면 그 어떤 존재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경하는 마음을 낼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왕가에 태어나면 사람들이 함부로 여기지 못할 것이며, 추위나 더위, 굶주림이나 목마름과 같은 고충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에 들어가서 보살의 집안에 태어난다는 것이 딱 그와 같습니다. 붓다의 자식(佛子)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하늘의 신이나 용, 귀신이나 모든 성인들이 함부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공경할 것이며, 삼악도나 인간과 천상의 비천한 곳에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문과 벽지불이나 다른 사상가들이 와서 그의 마음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은, 둘째로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내어서 일심으로 “오늘부터 온갖 악한 마음을 절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며, 그저 모든 생명들을 해탈케 하기 위해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겠습니다”라고 발원하는 것입니다.(계속)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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