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한 태풍 하나쯤 한반도를 훑었으면 싶을 정도로 유난히 길고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그래도 계절은 정직하다. 창백하게 달려있던 사과도 제법 불그스름하게 영글어가고 밭두렁에 세워놓은 들깨단도 고소하게 익어간다. 모처럼 포행을 나와 코스모스 넘실거리는 가을들녘을 걸으니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워진다.

해거름녘이 되자 하늘이 거뭇해지더니 강한 바람을 동반한 장대비가 열대지방 스콜처럼 쏟아졌다. 늦더위에 지친터라 느닷없이 내리는 소나기가 반가운 반면, ‘사과가 많이 떨어지면 어쩌나’ ‘깻단이 비에 젖으면 큰일인데…’ 이만저만 걱정이 쌓여갔다. 하늘도 무심하지, 시간이 갈수록 빗방울은 더 굵고 거세졌다. 그 때 불길한 예감에 창문을 올려다봤다. “아뿔싸!” 거짓말 조금 보태면 제주도 정방폭포마냥 창틀에서 폭포수처럼 줄줄줄 비가 새고 있었다.

한꺼번에 내리는 폭우로 이음새 물받이가 버텨내지 못한 것인지, 기왓장 일부가 깨져버린 건지, 범람한 빗물로 방안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돼버렸다. 여름 장마나 태풍에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책과 물건들을 다급히 옆방으로 옮겨놓고 크고 작은 대야를 총동원해서 빗물을 받쳐놓고 걸레를 전부 꺼내 정신없이 닦아냈다. 간혹 TV에서 수재민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내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됐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막상 눈앞에서 벌어진 내 일이 되고 보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던지…. 다행히 폭우는 잦아들었다. 바깥을 살펴보니 강풍에 꺾어진 나뭇가지와 잎들로 어수선하지만 큰 피해는 없는 듯했다. 비로소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왔더니 푸석했던 흙과 꽃나무들은 밤새 내린 폭우가 감로수 역할을 했는지 생기를 머금고 한 뼘씩 자라있었다. 폭우로 질펀해진 방바닥을 내내 훔쳐내고 비설거지를 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성품과 내 마음이 거울처럼 여실히 마주 보여졌다.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