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무량사 ‘설잠스님길’

설잠스님보다 김시습으로 유명

정의 추구했던 조선시대 생육신

 

사계절 숲 좋지만 가을단풍 명성

만년 주석했던 청한당 최근 복원

태조암 왕복길은 심신치유 역할

조선시대 생육신 중 한명이었던 설잠스님(김시습)이 만년에 주석했던 무량사 전경.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평생 올곧은 지조를 지키다가 한생을 마감한 설잠스님(1435~1493)의 서늘한 체취를 찾아 부여 무량사로 향했다. 설잠스님이라는 법명보다는 김시습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설잠스님. 조선 세종 때 ‘조선의 공자’로 불릴 만큼 천재성을 타고 태어난 신동이었던 스님은 조선왕조의 처절한 왕권다툼과 불의에 저항하는 충신들의 죽음을 보고 불문(佛門)에 의탁해 전국을 유랑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두루 섭렵했던 김시습은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머무르며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소식을 접한다. 울분을 참지 못해 대성통곡한 그는 서책을 불사르며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심지어 화장실에 빠지기도 했다.

설잠스님 진영.

22살 때 사육신이 마침내 처형되자 김시습은 성삼문, 유응부 등의 주검을 수습한다. 이후 온 산하를 주유한 설잠스님은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의 용장사에 정착해 부처님께 조석으로 예불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다. <금오신화>는 불의가 판을 치는 현실에 고통 받으면서 이상적인 세계를 염원한 성과물이었다.

스님은 남산 용장사에서 매일 맑은 물을 올려 예불하고 예불이 끝나면 곡을 하고 곡이 끝나면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면 시를 지었다. 시가 끝나면 또 곡을 하고는 시를 불태워버렸다. 조선왕조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그는 절망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한 산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였다.

한 일간지 칼럼니스트는 설잠스님의 <금오신화> 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진암 입구에 모셔져 있는 설잠스님 묘탑.

“절대 낙관할 수 없는 절망적 현실의 횡포, 그렇다고 비관만 하며 사람살이의 이상과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는 상황. 바로 이 지점에서 전기소설 ‘금오신화’는 탄생한다. 김시습은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사회의 인정과 진실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설잠스님은 만년인 1492년 여름 만수산 무량사로 들어온다. 짚신과 지팡이 하나로 전국을 주유한지 30여년이 된 후였다. 그 이듬해 2월 스님은 <묘법연화경> 발문을 쓰고 3월에 마지막 시를 남기고 입적하는데 임종게송(臨終偈頌)이 된 셈이다.

 

春雨浪浪三二月 扶持暴病起禪房

向生欲問西來意 却恐他僧作擧揚

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삼월/ 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대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다른 승(僧)들이 떠받들까 두렵다.

 

설잠스님이 만년에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청한당.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고통스런 현실을 조문(弔文)한 ‘시대의 방랑자’가 머물렀던 만수산 무량사에 든다. 폭염의 날씨에도 만수산의 깊은 숲은 더위를 품어 열기를 식혀준다. 계곡은 오랜 가뭄으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외기둥 2개가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일주문 너머로 수백 년 넘은 느티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무량사로 들어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적비와 공덕비가 도열하듯 서 있고 사찰이 배려해 준 듯한 휴식터인 정자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들면 천왕문이 눈썹과 마주친다.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 너머에 석등과 오층석탑, 2층 규모의 극락전이 액자에 들어차 있는 듯이 눈에 쏙 들어온다. 무량사의 풍경은 전국에 사진 찍는 작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늦여름 평일임에도 사진을 찍는 작가들의 셔터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종각 옆에 서 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의 늘어짐이 석탑과 오층석탑, 극락전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 여름 내린 비로 자란 이름 모를 대형버섯도 느티나무 아랫둥치에서 자기 멋을 더하며 자라나 있다.

극락전 옆 요사채인 우화궁을 지나 사찰 안쪽으로 접어든다. 좌측에는 설잠스님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 있다. 우측에는 개울이 있고 그 너머에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설잠스님이 거처했다는 곳으로 2007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스님의 호인 청한자(淸寒子)의 이름을 따서 ‘청한당(淸閒堂)’이라 부른다. 청한당으로 다가가서 극락전을 바라다본다. 얕은 개울을 건넜을 뿐인데 세속과 한 걸음 더 떨어진 선계(仙界)에 들어온 기분이다.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을 설잠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에 스치며 미간이 찌푸려진다.

다시 영정각으로 향한다. 500여년 전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떠받아 고통스럽게 살았던 스님의 모습이 진영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극락전 앞마당을 나와 도솔암과 태조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철 숲길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이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다. 하지만 길섶에는 밤나무 감나무 자작나무 등 유실수와 조경수가 어우러진 숲길이다. 즐비한 감나무는 과거 이곳에 많은 암자가 있었거나 근자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천왕문으로 오르는 무량사 숲길.

일주문에서 30여분 오른 끝자리에는 태조암이 있다. 여기에서부터는 만수산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과거 무량사에는 12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만수산의 넉넉한 품을 짐작할 수 있다.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발길을 돌려 일주문 밖으로 향한다. 무진암 입구에 있는 설잠스님 부도를 친견하러 가기 위함이다. 매표소 아래로 내려와 다리를 건너에 위치한 무진암 입구에는 여러 부도가 서 있는데 가장 큰 부도가 설잠스님 부도다. 스님의 부도탑의 이름이 특이하다. ‘五歲 金時習之墓’라고 적혀 있다. ‘오세 김시습지묘’라니 스님의 부도탑이 ‘묘’라고 적힌 이유는 스님이 입적한 후 곧바로 다비를 하지 않고 매장한 뒤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생전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이를 본 스님들이 성불한 선지식으로 여겨 다비를 한 뒤 부도에 모셨다. ‘오세’라는 호칭은 세종대왕이 신동이라 불리는 스님의 어린시절 글솜씨를 칭찬한 일에서 연유되었다.

무량사를 나오며 ‘이 시대의 설잠은 있는가’라고 반문해 본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주유한 생육신의 절개.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좇아 불나비처럼 떠도는 정치의 시대에 설잠스님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만수산으로 오르는 끝에는 태조암이 자리하고 있다.
TIP 걷기 안내 

무량사는 보물이 무려 6개나 되는 천년고찰이다. 극락전, 오층석탑, 석등, 괘불, 설잠스님 진영, 극락전 소조아미타삼존불이 그것이다. 그래서 매표소가 있어 성인은 2000원을 내야 한다. 하지만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즐비한 문화재와 숲길은 충분한 보상을 준다.

일주문부터 색다르다. 원목을 생긴 그대로 세운 두 기둥이 고즈넉한 산사분위기를 연출한다. 무량사의 가을단풍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천왕문을 지나 도량에 자리한 느티나무는 고찰과 잘 어울린다. 이곳에 있는 소나무도 무량사와 조화를 이룬다.

극락전 옆에 서 있는 배롱나무도 압권이다. 극락전 옆 우화루를 끼고 올라 바라보는 청한당도 무량사 걷기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설잠스님의 진영이 봉안돼 있는 영정각 앞에는 수령이 백년은 넘음직한 뽕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뽕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할 가치도 있어 보인다.

경내를 둘러본 뒤 다시 일주문으로 나와 도솔암과 태조암을 걷는 길도 추천한다. 이 길은 자동차 도로이긴 하지만 차량의 출입은 거의 없다. 1km 거리에 자연적으로 조성돼 있는 길섶에는 감나무 밤나무 등 유실수도 즐비하다.

[불교신문3234호/2016년9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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