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신원사 주지 중하스님

지난 9일 공주 신원사에서 만난 중하스님. 스님은 “‘고통받는 즐거움’을 알아야 인생의 참된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며 불자들의 노력과 정진을 주문했다.

“추운 겨울이 있어야만

봄의 고마움을 아는 법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억울한 역사라도

국민전체가 잊지 않고 되새기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국력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매년 10월8일 명성황후 다례재

산사음악회 벽암장학회 만들어

지역화합 교세확장에도 이바지

 

예로부터 ‘도 닦으러’ 가겠다는 사람들은 주로 계룡산에 간다. 그만큼 신산(神山)이다. 산봉의 형태가 위로는 닭의 머리를 닮았고 아래는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는 구전(口傳)부터 신령스럽다. 풍수학적으로도 상서롭다. 백두대간에 흐르는 천하의 지맥이 응축되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했을 때 새로운 도읍지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끝내는 탈락했고 왕조는 계룡산에 제단을 세워 산신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공주 신원사의 명물은 중악단(中嶽壇)이다.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다는 태조 이성계의 예지몽은 유명하다. 그는 꿈속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불이 난 집을 탈출하는 자신을 봤다. 이성계의 든든한 책사였던 무학대사는 그것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길몽이라고 해석했다. 화택(火宅)은 멸망을 목전에 둔 고려를, 각목 세 개를 나란히 등에 들쳐 업은 이성계의 모습은 ‘王(왕)’이라는 글자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신원사는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의 남쪽을 지키는 절이다. 북쪽의 구룡사는 소실됐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에 성공한 후 자신의 나라를 후견해줄 신들을 청했다. 몽중(夢中)에 나무를 일렬종대로 들었다는 점에 착안해 남북 방향으로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 줄줄이 산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 상악단 중악단 하악단으로 1394년의 일이다. 상악단과 하악단은 오늘날 사라졌고 중악단(中嶽壇)만 살아남았다. 장수한 덕분에 보물 제1293호이기도 하다.

중악단은 절 안에 있지만 절과는 사뭇 다른 구조다. 왕궁의 축소판. 구릉지의 동북과 서남을 축으로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1.5m 남짓 높다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의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이다.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했다. 궁궐의 전각을 지을 때 사용하던 기법 그대로다.

중악단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설치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두어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 부처님을 기리는 공간은 아니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복을 비는 기도도량이다. 한때 중악단은 무너지기도 했다. <경국대전> 편찬으로 성리학적 체제를 완성한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미신 혁파를 명분으로 철거했다. 쓰러진 신전을 다시 세운 인물은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였다.

1879년 중악단을 복원한 그녀는 이곳에서 자주 국태민안을 위한 제사와 기도를 올렸다. 외교의 달인이었다거나 또는 희대의 악녀였다거나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물론 비운에 절명했다는 점에 대해선 모두가 동의한다. 일본 낭인들에게 참화를 당한 을미사변. 그녀의 기일은 1895년 10월8일이다. 그리고 해마다 10월8일이면 여전히 한을 씻지 못했을 영가를 위해 중악단에서 추모다례재를 지내주는 스님이 있다. 신원사 주지 중하(中荷)스님은 “한 나라의 왕비이기에 앞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한 여인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매년 정성을 낸다”고 말했다.

알고 보면 정성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헌신에 가깝다. 국가 차원의 명성황후 추모대재 봉행을 청원하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서명운동의 또 다른 목적은 그녀가 복원한 중악단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다. 이른바 ‘국모(國母)’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국모에 대한 기억과 존숭이 국민을 각성시키고 국론을 통합하는 지름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역사를 스스로 외면하고 방치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억울한 역사라도 국민 전체가 잊지 않고 되새긴다면, 다시는 그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국력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명성황후 추모다례재는 결국 중생구제의 일환이다. 2011년 신원사 주지로 부임한 중하스님은 외딴 기도처를 지역포교의 거점으로 일신하고 있다. 그 시작이었던 추모다례재는 공주시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2012년부터 공주시 차원의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산사음악회가 가미됐다. 더불어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부처님의 자비가 지역민의 삶 속에 젖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은사인 벽암스님의 법명을 딴 ‘벽암장학회’를 설립해 주변의 고학생들을 위해 매년 3000만원을 장학금으로 베푼다. 불교용품을 판매한 기금 전액과 경내에 비치한 불우이웃돕기 모금함을 탈탈 털어 마련한 돈이다. 공주시사암연합회 회장으로서 교세 확장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출가수행자의 궁극적 이념이 실감나는 삶이기도 하다. 올해 세수(世壽) 일흔을 맞은 중하스님은 불교학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주제는 ‘중악단을 중심으로 한 불교와 토속신앙 간의 관계.’ 스님은 “어려서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됐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대단한 노익장이고 학구열이지만, 그 내막엔 아픈 개인사가 꿈틀대고 있다. 6ㆍ25 난리 통에 절에 맡겨진 게 겨우 여섯 살 때였다. 출가가 곧 출생이었던 셈이다. 피난하던 도중 경북 울진에서 어머니와 헤어지는 단장(斷腸)의 비극도 겪었다.

1964년 불국사에서 벽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9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4년 불국사 수선안거 이래 47하안거를 성만했다. 1970년 통도사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영산대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2011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올해 일흔의 나이지만 박사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탁발을 하고 농사에 내몰리면서도 글공부를 향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은사인 벽암스님은 “중이 ‘중질’만 잘 하면 됐지 무슨 대학이냐”며 연방 꿈을 꺾었다. 자신이 동국대 이사장이면서도 종비생으로 입학하게 해달라는 상좌의 원을 끝내 들어주지 않을 만큼 모질었다. 물론 그것은 사사로움을 허락하지 않는 공심(公心)의 결과였다. “은사 스님이 입적한 방에는 오직 승복과 책 몇 권뿐 10원 한 장 남아있지 않았지요. 수행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중하스님은 신원사 경내에 은사인 벽암스님과 은사의 은사인 적음스님의 부도를 조성하며 마음의 빚을 갚았다.

스님의 도반들은 거의 환속했다고 한다. 1950~60년대 불교정화운동의 격동기를 보낸 스님도 유혹에 넘어갈 뻔 했다. “젊은 혈기에 샛길 안 타고 고비를 잘 넘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예불마다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 올리는 개인적인 기도문이다. 일찍 고아가 된 설움과 가난이라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수행력으로 회향하려 무진 애썼다. “수행자는 절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깨끗하다”는 말은 신원사의 맑은 정적과 닮아 있다.

“차가움이 뼛속까지 사무친 적 없다면 어찌 매화꽃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 중국 당나라 황벽희운(黃蘗希運) 선사의 게송이다. 정진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무려 47차례의 안거를 난 중하스님도 마찬가지다. “‘고통받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상의 법열은 극강의 고통에서 피는 꽃입니다. 추운 겨울이 있어야만 봄의 고마움을 아는 법입니다. 인생의 참맛은 쓴맛이에요.” 마음에 뚝심이 아닌 질투심만 가득한 세태여선지, 더욱 귓전에 울리는 가르침이다.

[불교신문3234호/2016년9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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