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탄허스님

불교신문 1980년 3월23일자

‘이 달의 설법’ 삶과 죽음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탄허스님은 출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세수 24세 때부터 승려연합수련소에서 중강(中講)으로 <금강경(金剛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등을 강의했다. 이후 열반에 들기까지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도인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아

죽는 것을 헌 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하니 때 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겠는가

 

한반도의 젊은이라면 3천만

5천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 잘못은 3천만

5천만에 영향 미친다 생각해야

 

무슨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 않도록 준비하며 살 일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자(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즉 생사(生死) 문제야 말로 그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풀어내야할 중심문제이다.

인간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생사문제를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해결한다. 즉 마음에 생사가 없다고. 부연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구녁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道通)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生) 구녁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녁이 없으므로 죽는 구녁도 없다. 그러니까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수가 있다. 그렇지만 어린 중생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성인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 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굳이 때 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뭇 중생들의 우견(愚見)일 따름이다.

도를 통한 사람은 몸뚱아리를 그림자로 밖에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간밤에 꿈꾸고 다닌 것이나 같이 생각한다고 할까. 간밤 꿈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선 무언가 분명히 있었긴 있었으나 헛것이듯 그렇게 삶을 본다.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이 육신을 굳이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들면 향 한 대 피워놓고 향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죽음) 수도 있다.

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 1980년3월23일자(824호) 2면에 실린 탄허스님 ‘이달의 설법’.

일반적으로 중생에겐 나서 멸함이 있고(生住異滅), 몸뚱이엔 나고 죽음(生老病死)이 있으며, 1년에 봄·여름·가을·겨울(春夏秋冬)이, 세계엔 일었다가 없어짐(成住壞空)이 있으나 앞서 말한 대로 도인(道人)에겐 생사가 붙지 않는다. 혹자는 그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옷 벗는 것 보고 죽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을 자기 ‘몸’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그걸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지리, 우주 생기기 전의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란 뜻이다.

부처란 바로 이 ‘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의 한 마당 삶이 ‘꿈’이란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더웁고 춥고 괴로운 경험을 꿈속에서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이 육신이 일점도 안 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 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백년을 산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곧 ‘내’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 줄 안다. 현실 이것도 꿈일 줄 모르고.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이 도통했다는 것은 이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걸 말한다. 우리는 간밤 꿈만 꿈으로 보고, 현실로 보니까 몇백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며 아등바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눈엔 현실이 꿈, 즉 환상이니까 집착이 없다. 그러니까 천당 지옥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이 정도로 말해 놓고 나서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하고 찰나로 보면 찰나일수 있다고 말하면 좀 수긍이 될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주창조주, 즉 하느님이라는 건 우주 생기기 전의 면목을 타파한 걸 ‘하느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란 하늘 어느 한 구석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는 어떤 실재인물이 아니란 말도 이해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할까.

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3000만, 5000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 잘못은 3000만, 5000만명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무슨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갖추며 살 일이다. 청년은 그런 자신을 길러야 한다.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서의 탄허스님.

정리=김형주 기자 [불교신문3233호/2016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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