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익산 미륵사지

“신라 성덕왕 19년 9월에 낙뢰(落雷)로 인하야 차탑(此塔, 이 탑)이 반이나 붕퇴(崩頹, 무너짐)하였던 바, 대정(大正) 3년에 총독부(總督府)에서 다시 보수(補修)하였다. 차탑은 조석 석탑 중에 최대(最大)한 유적물로 그 제조(提造)가 심히 웅미(雄美, 아주 아름다음)한 것이다.” 

정유재란 당시 폐사 추정

한국 최대의 석탑 ‘봉안’

조선총독부 시멘트로 보수

 

사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석탑 해체보수 작업 진행

익산 미륵사지. 왼쪽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 작업을 진행하는 서탑. 오른쪽은 1992년 복원한 동탑.

 

일제강점기인 1926년 7월 한 일간지에 실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石塔)에 대한 기사이다. 백제 무왕 당시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의 탑은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반 정도 붕괴되었으며, 대정 3년, 즉 1914년 조선총독부가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는 탑의 붕괴된 부분을 시멘트로 메워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선조가 물려준 찬란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후손들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외인(外人)들에 의해 흉측한 형상을 갖게 된 미륵탑에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시멘트를 걷어내고, 미륵탑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몇 해 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인 익산 미륵사지를 방문한 지난 8월말, 시민과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형 가림막을 설치해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웅장한 미륵사지와 석탑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해체 보수 작업 중인 서탑.

미륵사지와 탑은 오랜 기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1926년 10월9일자 <동아일보>에는 “우리 익산은 전북의 큰 고을인 만큼 가장 자랑거리가 많습니다만, 본래 마한(馬韓)의 옛도읍터로 지금까지도 폐허된 왕궁의 터가 뚜렷이…, 위엄을 회억(回憶, 돌이켜 생각함)하게 하며… 미륵탑의 눈물겨운 형상이외다.… 겨우 반편만 남은 몸으로 지금까지 일천수백년동안을 봄바람과 가을비에 하염없이 지내왔답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신문은 ‘화강암의 반신탑(半身塔)은 마한(馬韓)의 최후 유물…나라는 깨지고 산천만 의구한데, 이천여년 동안을 눈물로 지내와’라는 제목을 달았다. 망국의 설움을 지닌 미륵사지 석탑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분심(忿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서기 600년 백제 무왕이 즉위하면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석탑 안에 사리를 봉안한 것은 639년이다. 한때 도읍을 익산(왕궁리)으로 옮길 만큼 번성했던 백제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는 점차 쇠락을 길을 걸었다.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미륵사지 역시 세인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년) 가을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전문가들은 이 무렵을 기점으로 미륵사가 퇴락의 길에 접어든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혜거국사비문’에는 “용덕(龍德) 2년 여름 특히 미륵사탑을 다시 세우고”라고 적혀 있다. 미륵사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용덕 2년은 서기 922년으로 고려 태조 5년에 해당한다.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 시기에 오랜 기간 방치된 미륵사의 탑을 왕건 즉위 5년 되는 해에 다시 세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백제의 마지막 상징이며, 후백제 지역의 구심점이었던 미륵사 석탑을 복원하여 민심(民心)을 추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600년~641) 때에 용화산 연못에 미륵 삼존불(三尊佛)이 나타나 절을 지었다고 한다.

해체 보수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석탑 내부. 지난 8월 27일 모습.

조선시대에도 미륵사와 석탑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조선 태종은 1407년 미륵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한다. 또한 조선 전기 문신 김종직(1431~1492)은 그가 저술한 <점필재집(畢齋集)에서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니 귀신의 공적인지 사람의 힘인지 끝내 아득하기만 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양곡집> 등에도 미륵사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미륵사는 용화산에 있는데…석탑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크다.(신증동국여지승람)” “사찰에 인적이 드물고 낮에도 사립문이 닫혀 있을 정도로 한적하다.(양곡집)”

특히 1738년 전북 고창의 학자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에는 폐허가 된 미륵사를 증언하고 있다. 금마성은 지금의 익산시이다. 그는 이 글에서 “미륵산 서쪽 산기슭에 옛 미륵사터가 있다. … 미륵사는 100년전에 폐허가 되었으며…밭두렁 가운데 대단히 크고 높은 7층 석탑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즉 1600년대에 미륵사지가 폐사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정유재란(1597년) 시기로 호남을 침입해 전주성과 남원성을 함락한 왜군(倭軍)이 미륵사를 폐사찰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말 혼란기를 거치며 사지는 농토로 바뀌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석탑의 석재들의 훼손을 막을 수 없었다. 사지는 허물어지고, 탑은 남루해졌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을 조사하면서 미륵사지도 대상에 넣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사지를 조사하고, 석탑과 당간지주 등을 촬영했다. 1915년에는 석탑 실측조사 후에 시멘트로 보수했다. 또한 총독부는 1934년 석탑을 국보로, 1940년 당간지주를 보물로 지정했지만 체계적인 보존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륵사지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는 폐허로 방치됐다. 1962년 정부에서 석탑을 국보 제11호로 지정하고, 이듬해에 당간지주를 보물 제236호로 지정했다. 1966년에는 사지를 사적 제150호로 지정했는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74년부터 동탑지 발굴조사를 시작하고, 1976년에 동탑지를 정비했다.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부터 진행됐다. 동탑을 복원한 것은 1992년이며, 석탑 해체보수를 결정한 것은 1999년이다. 그 결과 1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성보문화재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000년 금동향로가 확인되었으며, 2001년 석탑을 해체한 결과 2009년에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도 환희심으로 반겼다. 엄청난 무게의 주초석(柱礎石) 아래 봉안되어 있었기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미륵사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그해 12월3일 석탑에서 출현한 사리를 재봉안했다. 지금은 석탑을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석탑은 금당(金堂) 앞에 위치하고 있어, 익산 미륵사지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석탑이지만 벽돌을 오밀조밀 쌓아 올린 전탑(塼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올 가을 결혼을 앞두고 연인과 미륵사지를 찾은 김현준 씨는 “전주에 살고 있으면서, 그동안 한 번도 오지 못했지만 꼭 한번 가봐야 한다는 주변 이야기를 듣고 방문했다”면서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사찰이 있었는지 깜짝 놀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선조들의 지혜와 장인(匠人) 정신이 깃든 탑이 잘 복원되어 후대에 길이 전해지길 바란다”면서 “다른 지역에 사는 분들도 이곳에 와서 장엄한 문화유산을 확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륵의 출현을 발원하며 선조들이 세운 미륵사가 온전하게 복원되어 후대에 천년만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불교신문3233호/2016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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