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까마귀 계수나무 위를 날고

박부영 지음/ 불교신문사

 

치열한 수행과 계율, 자비행으로

혼란기 한국불교를 이끈 금오선사

그 가르침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농사꾼이 농사를 열심히 짓듯

장사꾼이 장사를 열심히 하듯

수행자는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큰일났구나. 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다니. 이토록 난감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필경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을 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겠구나.”

금오스님이 만주와 러시아 땅이 합해지는 회령지방을 지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스님은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바깥에 나타나 쇠창살 두 개를 쑥 뽑아 올리자 쇠창살이 그대로 빠져 버렸다. 그는 스님을 향해 씩 웃고는 다시 쇠창살을 꽂아 놓고 사라졌다. 비몽사몽간에 이 일을 접한 금오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쇠창살 두 개를 뽑자 이상하게도 쏙 뽑히는 것이었다. 탈옥에 성공한 스님은 불보살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해하면서 만주 봉천의 깊은 토굴에 있는 수월스님을 찾아가 열심히 정진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 선방에 왔느냐?” “견성성불을 이루기 위해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오스님의 죽비가 내려쳤다. “그래, 견성성불을 이루기 위해 온 놈이 허구한 날 이렇게 졸고 있느냐. 참선 수행중에 그렇게 졸고 앉아 있으면 꿈속에서 떡 장사에게 떡은 얻어먹을지언정, 견성성불 이루기는 애초부터 글렀어.” 수좌는 말문이 막혔다. “수행이란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요, 장사꾼이 장사를 열심히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출가수행자가 공부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참선수행 중에 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일반인에게 금오스님은 정화운동에 앞장선 스님으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정작 본분은 수행자였다. 특히 금오스님은 수행과 계율에 엄격했다. 금오스님에게 정화운동은 어찌보면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할 공간을 되찾는’ 방편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불교의 수행풍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었다. 일제는 스님들에게 결혼을 강요했으며, 결혼하지 않는 수좌들은 사찰 주지도 못 맡도록 탄압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금오선사를 비롯해 선 수행에만 전념하며 천년을 이어온 불교의 수행 가풍을 지켜온 수좌들이 300여 명 있었다. 

정화운동의 주축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토굴수행을 즐겼던 금오스님은 근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사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대사찰만이 아니라 각급 사원까지 놀이터 내지는 유흥장으로 변하여 법당 앞의 누각에는 술동이가 놓여있고, 기둥에는 돼지다리가 걸렸으며, 취객의 가무음곡이 끊이지 않았다. 사원의 방사는 유흥객의 숙박이나 휴식처로 제공되었고, 이를 통해 승려들이 돈을 벌었다. 사원이 수도, 기도하는 도량이 아니고, 사업장화 되어 승려들은 양복에 가방을 들고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처자가 있는 속가로 퇴근했다.” 금오스님이 정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금까마귀 계수나무 위를 날고>에서는 금오스님의 진면목을 수행에서 찾는다. 또 자비심을 늘 강조했다. 스님의 법문에서도 이런 면모가 잘 나타난다.

“수행에는 보시법을 빠트릴 수 없나니, 보시는 한없는 공덕과 복락을 안겨다 준다. 견성성불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면 보시법을 터득하여 보다 깊고 넓게 감행해야 한다.”

“일체중생을 제도하되 병든 자에게는 약풀이 되고, 허기진 자에게는 음식이 되며, 소낙비 같은 총알 속에서는 방패가 되며, 죽음과 칼 독약 화약 따위가 올지라도 갖가지의 몸이 되어 막고 보호해야 하느니라.”

금오스님이 처음 조실을 맡은 것은 40세의 나이였다. 16세에 출가해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정진한지 24년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스님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인내력과 정진력으로 숱한 고난을 헤쳐왔다. 또 당대 최고의 선승을 모두 참방하며 배움을 다지고 다졌다. 스님이 직지사 조실로 오자 수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금오스님은 토굴 수행을 좋아했다.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의 일화다.

금오스님은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며 밤낮으로 산을 개간했다. 500여 평의 밭을 지어 메밀을 심었다. 그렇게 3년간 주석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전의 일로, 월성스님의 회고담이다.

“한번은 장작할 나무를 베러 산에 갔는데 큰스님이 사사건건 간섭했다. 주장자로 가리키며 ‘여기를 베라, 저기를 베라’ 귀찮을 정도였다. 그때는 다른 사찰로 옮길 무렵이었는데, 금오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자고 했다. 이에 ‘이제 여기를 떠날건데 왜 나무를 합니까?’ 반문을 하니 ‘네 놈이 여기 왔을 때 장작이 있었지? 네놈이 그랬듯이 다른 수좌가 또 올텐데, 미리 장작을 해놓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네가 할 일이다.”

해방 이후 시대적 상황은 수좌들이 참선수행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때론 죽음을 무릅쓰고 왜곡된 불교를 정화해야 했다. 금오스님은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행도, 계율도, 중생을 향한 포교와 자비행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금오스님은 입적했지만, 스님이 한국불교를 위해 남긴 족적은 지금도 많은 후학들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이 책은 금오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 금오선사 연보


금오선사는 1896년 7월 전남 강진에서 2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되던 1911년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도암긍현 선사를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안거를 시작했으며, 1921년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율사에게 구족계를 수지했다. 호는 금오(金烏), 휘는 태전(太田).

30세 되던 1925년 예산 정혜사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보월선사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건당식을 갖고 ‘금오’라는 법명을 받았다. 40세 때 김천 직지사에서 조실을 지낸 후 안변 석왕사, 서울 망월사, 의왕 청계사, 하동 칠불선원, 김제 금산사, 대구 동화사 등에서 조실로 추대받아 수행과 후학 지도를 병행했다. 1954년 전국비구승대회에서 정화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한국불교 정화운동에 앞장 선 스님은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불교의 기틀을 잡았다. 1961년에는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불교를 알리고, 싱가포르와 대만, 일본 등을 방문해 세계의 불교현황을 우리나라에 전했다.

1967년 법주사 조실로 추대된 스님은 이듬해 10월8일 법주사 사리각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57세, 향년 73세였다.

 

■ 금오선사에 대한 스님들의 찬(讚)


“까마귀 날자 구름 흩어지니 달이 비로소 생기고/ 열반으로 가풍을 보이니 대지가 펼
쳐지도다/ 소리와 색이 함께 공하여 자취 없는 곳/ 산 높고 물 맑은 국화 핀 가을일래”
경봉스님이 금오선사를 찬(讚)한 글이다.


금오스님이 원적에 들자 당대 어른 스님들이 안타까움을 글로 전했다. 그 글은 1974년 월산스님이 발간한 <금오집>에 남아 있다. 금오선사의 면모를 알수 있는 좋은 글이다. 향곡스님은 선사에 대해 “어떤 때는 평상에 올라가 앉고, 어떤 때는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불자를 들기도 하고, 또창천 창천 허허 소리를 치고, 어떤 때는 방을 휘두르고 할을 하며, 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혹은 놓아 주기도하고 잡아 당기기도 한다”며 선사의 수행과활동을 평가했다. 스님은 또 “앉아야 할 때면 앉고, 가야 할 때는 가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무르고, 일어나야 할 때면 일어난다”며 자유자재했던 모습을 회고했다. 

상좌인 월산스님은 “성격이 엄격하시나 말씀은 인자하시었다. 살림살이에는 빈객(賓客)이었지만, 종통을 바루고 정재를 가꾸는 호지삼보의 대사에는 늘 주인이 되셨으며 정화불사를 주관하여 크게 이끌어 주셨다”며 은사를 회고했다.


이 책에서는 또 원로의원 명선스님과 인환스님, 월서스님의 글이 함께 실렸다. 금오스님에 대해 명선스님은 ‘절구통 수좌’로, 월서스님은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인스승”으로 기억했다. 또 인환스님은 “여러어려움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하게 정화불사를 이끌어 내는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회고했다.

[불교신문3233호/2016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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