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어록석의 上 下

장산스님/ 조계종출판사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조주선사 공안을 정리해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栢樹子)”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없다(師云無)” “그대들은 여기 와본 적이 있는가”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

선(禪)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도 한 번은 들어본 유명한 화두(話頭)들이다. 모두 주인공이 조주(趙州)선사다. 당나라의 공안 1700칙 가운데 가장 뛰어난 100칙이 실린 <벽암록>은 ‘안개 낀 바다의 나침반, 밤길의 북두’라 찬양할 정도로 종문(宗門)의 제일서(第一書)로 송대에 수좌들이 이 책만 들여다보며 외우자 대혜종고스님은 선(禪)이 형식화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간본(刊本)을 회수해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만큼 선가에 끼친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임제선을 잇고 있는 한국의 불자들에게도 조주선사는 친숙하다. ‘뜰 앞의 잣나무’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만큼 조주스님은 한국불자들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한글번역서가 많지 않아 조주선사의 진면목을 엿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조주어록석의>를 펴낸 장산스님. 스님이 주석처 부산 세존사에서 조주선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번에 장산스님이 조주어록을 한글로 풀고 해설을 곁들인 <조주어록석의>(趙州語錄釋義)(조계종출판사)를 펴냈다. 장산스님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화두로 동화사, 묘관음사 등에서 정진하고 토굴에서 3년 결사할 정도로 선객이면서 동명불원 주지, 대각회 상임이사, 조계종 초심호계위원, 법규위원, 역경위원 등을 역임한 종단의 중진이다.

이번에 펴낸 <조주어록석의>는 선교에 능통한 지혜와 경험이 녹아든 역작(力作)이다. 30여 년 전에 조주어록을 보면서 노트에 적어놓았던 것을 찾아 책으로 펴냈다. 스님은 “내가 토굴을 짓고 살면서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가 어느 날 문득 까맣게 잊고 있던 ‘조주어록’에 석의를 달아 놓은 노트를 발견하였다. 다락에서 먼지가 뽀얗게 덮여있던 30여 년 전의 노트를 반가운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내용을 다시 정리하였다”고 출간 경위를 밝혔다. 왜 조주스님인가? “조주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서”라는 스님은 “백장록 단경 임제록 등 선어록을 다 훓어보았는데 좋은 말씀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임제록에 임제가 보이지 않는 등 주인공인 선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주가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보였다”고 말했다.

조주스님은 누구인가? 스님은 남전(南泉, 748~835)선사 제자다. 778년에 태어나 120세를 살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 마하가섭, 청말 허운대사가 120세를 살았다. 조주(趙州)에서 살아서 조주가 법호가 되었다. 법명은 종심이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배워 사서삼경을 섭렵할 정도로 영민했다. 14세 때 고향의 용흥사로 출가하여 낙발하고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어느 날 은사 스님과 함께 남전스님을 참방하였는데 첫 대면할 때 일화가 아주 유명하다. 선사의 행장 첫 머리에 그 광경이 나온다.

남전선사가 방장실에서 반쯤 누워 있다가 조주가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그래, 서상(瑞象)을 보았는가?” “서상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누워 계시는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그러자 남전선사가 일어나 앉으면서 물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주인이 있습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봄이라고 합니다만 아직 춥사옵니다. 큰스님께서 존체 강건하심을 축복드립니다.” 남전선사가 유나를 불러 이르기를 “이 사미에게 별석을 마련해 주어라.”

그 후 조주스님은 남전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선사가 입적할 때까지 시봉하는데 그 때 조주스님의 나이 57세였다. 남전선사가 입적한 후 80세가 될 때까지 운수행각을 하였고 100세가 넘어서도 시정(市井)에 나가 탁발했다. 행장에 의하면 가끔 저자의 아낙이 나이 들어서까지 탁발하는 조주스님을 보고 ‘그 연세에 제자도 없습니까?’ 물으면 ‘그렇게 되었습니다’하고는 돌아왔다고 한다. 당나라 무종의 불교박해와 폐불의 수모를 겪으면서도 위의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나이 80세에 조주성 동쪽 관음원에 주석했는데 아주 궁핍한 절이었다. 부엌에 변변한 도구도 없었고 좌선용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져 타다 남은 장작개비를 끈으로 묶어 사용했다. 40년 동안 주석하면서 시주들 집에 편지 한 장 보낸 일이 없었다.

이 책은 조주선사의 일생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선어록에 해박한 지식을 살려 다양한 어록을 들어 설명을 곁들여 재미있으면서도 쉽다.

[불교신문3231호/2016년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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