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정완영 시조시인
1000여편 시조 남기고 타계

1919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정완영은 국제신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는 또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나래시조시인협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시단을 이끌어 왔다. 한국문학상,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유심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받기도 했다. 그의 시 ‘조국’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 ‘바다 앞에서’ 등은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조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남겨두고 가려구해

불교에서 받은 것

불교로 회향해야지

부처님의 그림자를

시인의 그림자를 담아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단지 열심히 살뿐이야

돌아갈 그날까지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이 지난 8월28일 타계했다. 향년 97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서럽게’ 청춘을 보낸 시조시인으로 민족과 불교를 노래하며 1000편이 넘는 시조를 남겼다. 1919년 경북 김천서 태어난 그는 1941년 처녀작 ‘북풍’ 등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경찰의 고문을 받기도 했던 정완영 선생은 1947년 동인지 <오동(梧桐)>을 창간해 활동하다가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이 당선된 이후 시조를 정립하는데 앞장서 왔다. 수많은 시조 가운데 그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단연 ‘분이네 살구나무’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정완영 선생은 신춘문예 등단 이후 거의 매일 시조 작품을 써오며, 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과 같은 정화된 시어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대상을 절묘한 시적 상상력으로 변용시키고, 시조의 음율을 잘 조화시킴으로써, 자유시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서정시의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이란 불교의 정신을 잘 우려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참사람이 돼야 한다.” 정완영 시인은 시를 불교의 정신을 담는 그릇에, 시인을 참사람에 비유했다. 부드러움과 여유, 그리고 치유의 성질을 지닌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과 시의 정신이 없는 세상은 혼탁하고 혼잡해질 수밖에 없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권하고 시를 권했다.

정완영 시인은 또 자타가 인정하는 불자다. 김천에서 태어나 “직지사에서 뛰어 놀며 성장했다”는 정 시인은 “불자라서 불교적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를 쓰다보니 불교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는 민족의 고유 언어를 최대한 정제해 사용한다. 자연스럽게 민족에 대한 사랑이 배이게 된다. 민족의 정서는 바로 불교에서 오롯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깊은 정신세계에 대한 관찰이 불교의 가르침이며, 자연을 대하는 마음도 불교만큼 세심한 것이 없다. 정완영 시인이 불교를 만난 것은 이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정 시인은 특히 정형시조를 즐겨 썼다. 정형시조는 45자 안팎의 글자로 의미를 함축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글에 대한 탐욕과 망상을 버려야 한다. 스님들이 수행을 통해 탐욕과 망상을 털어 내듯, 정 시인은 시조를 쓰면서 불필요한 생각을 털어냈다. 정완영 시인은 평소에 “내적 수행을 통해 오묘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 가운데 시적 감흥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며 “그 감흥을 문자로 옮겨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시인은 끊임없는 수행과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완영 시인은 36세 되던 해, ‘시인’이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아이가 넷 딸린 가장으로서 어찌보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주변에서는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 바로 시인인데, 참 무능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하지만 부자 밥먹듯 굶고 살았던 그는 김천에서 시를 ‘끄적’거리며 4명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그 중 맏딸은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 김남주의 제자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직지사 입구에 있는 백수문학관. 불교신문 자료사진

지난 2004년부터 본지에 ‘산중문답’이란 제목으로 108수의 시조를 써내려간 정완영 선생은 2005년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산이 다하고, 물이 끝난 곳에, 다시는 길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또 한구비 돌아서니. 버들 푸르고 꽃 붉은 골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 것이지. 지금 생각하면 세상이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졌어도 밥은 먹여줬으니 고맙지.”

“인생에 고난을 주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서 완성으로 이끌어주라는 가르침이나 다름없다고 봐. 절망 뒤에 소망이라고 할까. 다시는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은 언제나 생겨나는 것이 바로 삶이야.”

“산이 도인을 감춰놓아 청산이 더욱 푸르고, 봉선화 오얏꽃 흐드러지게 피니, 옛 부처 붉은 마음 토해놓네. 관음암 주련 내용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주련내용을 아무도 모른다니까. 참으로 안타까워.”

“살아생전 고향집 지키며 혼자 살던 어머니가, 죽어서 산으로 돌아가 산에서도 혼자 사네. 민들레 호롱불 켜놓고 봄 밤 혼자 새우셨네… ‘어머니’란 시야. 우주보다 더 큰 게 어머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그 많은 삶 중 유독 아픈 대상이 바로 어머니인가 봐.”

정완영 시인은 ‘민족적 서정을 재확립한 시인’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 내면에는 불교적 삶과 사유가 ‘한몫’을 했다. 할머니 등에 업혀 불교를 접한 그는 언제나 불교적 사유에 젖어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황악산에 산불이 나면 봄이 온다고 여겼다. 또한 자연과 벗하는 것은 ‘불경’과 ‘참선’ 이상의 것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직지사 관응스님은 그를 보고 “스님보다 스님을 더 잘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직지사 입구에는 정완영 시인의 작품세계를 간직한 백수문학관이 위치해 있다. 시인의 호인 백수(白水)는 ‘흰 물’이란 뜻이다. 오염되지 않은 물을 의미하는데,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인품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썼다. 60년 넘게 해온 작업이다. 이런 정화작업을 통해 맑아진 마음으로 시조를 썼던 정완영 시조시인이다.

내부에 정완영 선생의 집필실을 재현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말년에는 동심을 표현한 동시조를 주로 쓰면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밝게 하려는” 모습을 남겼다. 또 2004년부터 매년 백수문학관에서 문학제를 열고, 문학상·백일장 시상식을 가지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남겨두고 가려구해. 불교에서 받은 것 불교로 회향해야지. 부처님의 그림자를, 시인의 그림자를 담아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단지 열심히 살뿐이야. 돌아갈 그날까지.”(2005년 본지 인터뷰 기사 중)

“아무도 없는 고향, 텅 비워둔 내 고향집. 너랑 같이 내려가서 나랑 같이 살자. 달래고 타일러 주려고 풍경 한 좌를 사들였다. 너는 구원의 향기, 밤하늘에 먹을 갈고, 너는 태초의 별빛 먼 성좌에 불붙이고 꿈 깊은 밤이면 내가슴에 잠들거라. 숙조(宿鳥, 숲에 자러 들어가는 새)여. 내 가슴에 잠들거라.”(‘풍경’ 전문)

백수 정완영. 시조시인으로 평생을 맑게 살았던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수의 시조를 남기고, 열심히 살다 다시 돌아갔다.

[불교신문3231호/2016년9월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