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백중 위패 앞에 앉아

염불하는 내 볼에

세상에 덩그마니 남겨진

한 사내아이와

며칠 전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내아이가 자꾸 겹쳐져

눈물꽃이 비쳤다

행복이는 내가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는다. 누우면 거리낌도 없이 다리를 쩍 벌린다. 흰 털의 구부러진 뒷다리와 뒷다리 사이, 조금 숨겨진 듯한 암캐만의 그곳에서 빨갛고도 묽은 피가 방울져 비쳤다. 언뜻 보니 그곳은 단팥 앙꼬가 들어있는 작은 풀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 작고 부풀은 풀빵의 겉은 아직 구워지기 전의 밀가루 반죽처럼 해쓱한 빛깔이다.

처녀의 생리를 두고 ‘꽃이 비친다’라고 했던가? 행복이의 생리는 내게 꽃 중에 가장 슬프고도 붉은 꽃의 발화를 기억나게 하였다. 그 붉은 꽃은 일찍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원천이자 아픔이다. 스물일곱 살의 애 엄마 시신을 같은 또래의 아버지 친구들이 둘러메고 마을 뒷산에서 어둠을 틈 타 도둑화장을 했을 때,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불꽃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절실한 아이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버린 새댁의 시신을 화장하고 돌아왔을 때,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어쩌면 가슴이 자꾸 시렸을 것이다. 못내 시린 가슴을 데울 길 없어 선술집에 모여앉아 막걸리 사발을 밤새 순배도 없이 돌렸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이 불꽃은 아버지의 친구 중 누군가에게서 어릴 적 들었던 사실적인 내용에 덧붙여진 상상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를 그 어미의 도둑화장에 데려갈 어른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붉디붉은 화염을 늘 가슴의 통증으로 느끼고 살았다. 본 것보다 더 본 것 같은 불꽃이 가슴에 각인되었다. 엄동의 계절 차디찬 얼음 위에 버려져 발갛게 얼어터지는 발가벗은 아이의 형상 같은 화장장의 불꽃이 눈에 어른거렸다. 엄마가 죽자 젖을 못 뗀 아이 하나도 곧 뒤따라갔다. 다만,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반투명 유리창 건너편에 어른거리는 형상처럼 아물거리기만 할 뿐이다.

‘꽃이 비친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를 잃은 엄마의 피눈물이기도 하다. 오열도 말라 안으로 안으로만 확인되는 피멍 든 상처투성이 어린 꽃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다.

네 살 난 한 아이가 갑작스럽다는 말도 민망하게 하루아침에 뇌수막염으로 필리핀 병원에서 죽자 그 엄마는 잠시 정신을 잃었단다. 눈물보다 감정이 앞서 말이 전화기 너머로 자꾸 끊어졌단다. 죽은 아이를 싣고 필리핀에서 한국까지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하늘을 몇 번이고 살폈으리라. 그녀는 아이가 좋아하던 솜사탕 같은 구름과 온통 파란 빛깔의 구름 위 하늘에서 죽은 이들이 간다는 그 집을 거듭 살폈을 것이다. 그녀는 하늘의 집에서 자신의 아이가 맘껏 뛰어놀 수 있을지도 가늠했으리라. 구름 위에서는 달리거나 뛰어내려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융단처럼 깔린 흰 구름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젖는 붉은 태양, 그리고 이제는 상상이 되어버린 내 아이가 거기 꽃처럼 비쳤을 것이다. 화장이 끝나고 받아든 그 한줌 밖에 안되는 희뿌연 아이의 뼛가루 위에 엄마의 끊어진 애간장도 꽃으로 비쳤을 것이다.

아이의 백중 위패 앞에 앉아 염불하는 내 볼에 그 옛날 이 세상에 덩그마니 남겨진 한 사내아이와 불과 며칠 전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내아이가 자꾸 겹쳐져 눈물꽃이 비쳤다.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