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번뇌를 놓지 않으면 언제 할 것인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수명도 다하듯

공덕도 누리고 나면 사라지는 것

공덕 등한시한 수행엔 장애 따르니

불보살님은 자리이타에 함께 충실

교리에 따르면 증득한 경지에서 퇴실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인위(死)로 무여열반에 들려는 사법아라한(思法阿羅漢, 憂懼退失所得之證果, 思自害而入無餘涅槃者)이 있다고 합니다. 인과나 수행의 입장이 아닌 심정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마장(魔障)이더라도 수행과정에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내용이라서 가슴이 아리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지금’을 벗어날 때 ‘해탈’이 아니라 ‘회피’라면 어디까지 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단상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금생에 해탈하지 않으면 어느 생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증일아함경> 증상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네 범지는 모두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고 착한 법을 수행하는데 어느 날 한 곳에 모여 의논하였다. 죽음의 사자가 올 때에 그 억센 힘을 피하려 하지 말고 제각기 숨어서 그 사자로 하여금 어디로 올지 모르게 하자. 그래서 범지 네 사람은 죽음을 면하려고 제각기 갈 곳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한 사람은 허공에 있었고, 한 사람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으며, 한 사람은 산 중턱에 들어갔고, 한 사람은 땅 속에 들어갔으나 모두 죽었다(四梵志皆得五通 修行善法 皆共同死).”

위와 같은 종류의 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부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궤변으로 일관하지 않고 그 근원을 밝혀 보이면서 우리들에게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함께 가자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저 범지와 같은 행동을 하거나 궤변을 따르지 않을까 합니다.

해탈(解脫)은 해방의 의미로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어리석음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수행의 궁극 경지입니다(佛敎原以涅槃與解脫表示實踐道之終極境地). 그러나 완전한 해탈이 아니라면 자신의 수행 경지를 집착하므로 타인을 요익케 하는 것, 즉 이타(利他)에 소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표현으로 ‘해탈의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墮於解脫深坑)’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구덩이라도 얼른 보고 싶으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한 경험을 말하자면 때로는 이론에 근거한 공덕을 짓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일 없이 홀로 지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철저하게 공(空)의 이치를 체득하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서 인욕의 경계점에 걸렸을 때는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구덩이의 위치도 못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홀로 법열(法悅)을 희미하게라도 느끼고 싶을 때 독성청에 나오는 나반존자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법열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때 생기는 희열이나 사유하여 생기는 즐거움인데 하필 나반존자를 그리는 이유를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티끌과 더러움에 나가지 않으며 사라지고 나타남에 걸림이 없습니다. 때로는 층층의 높은 곳에서 조용히 머물러 평온하게 선정을 닦고, 혹은 낙락장송 속에서 오고 감에 임의대로입니다. 산은 깊고 물은 졸졸 흐르는 한 칸짜리 난야에 앉거나 누워 소요함에 꽃은 만개하고 새는 재잘거려 소리와 색깔이 분연하나 경행에 자재합니다. 저녁놀빛 가사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도를 즐기며 흰 눈썹에 가린 눈은 허공을 바라봅니다(霞衲半肩而樂道 雪眉覆眼而觀空).”

나반존자를 그려 놓은 탱화를 보면 깊은 산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한 채 홀로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산을 배경으로 홀로 선정을 닦는(獨修禪定) 그림은 출가 전 막연히 가졌던 ‘스님’에 대한 인상 그대로입니다. 처음에 출가하면 모두 그렇게 생활하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와 같이 지내는 분도 계시지만 번잡하고 수고스러울 때 더더욱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글을 보시는 분 가운데도 ‘출가자’를 이러한 모습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직접 그렇게 해보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라한이라도 복을 지어라’는 말의 뜻을 철저하게 알든지 아니면 알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필자가 지면을 통해서 오랫동안 공덕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공감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불자나 나반존자가 공덕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선정을 닦는 것이 공덕 없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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