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불교소년야구단

1921년 대구소년야구대회 ‘우승’

우승기 들고 대구시내 카퍼레이드

초등학교 학생 가운데 선수 선발

백석기 대구불교청년회장 ‘주도’

일제강점기 야구대회 시상식 모습. 사진제공=동국사일제강점기 대구부(대구시) 진도. 오른쪽에 공설운동장이 보인다. 사진제공=대구근대역사관불교소년야구단의 활동을 보도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기사.구도(球都)로 불리는 대구는 경기장이 여러 곳일 정도로 야구의 전통이 오래됐다. 사진은 대구 두류야구장에서 열린 불교행사.

 

“결국 우승의 월계관(月桂冠)은 불교군(佛敎軍)의 두상(頭上, 머리)으로 귀(歸)하얏다. 일로써 대회의 종(終,끝)을 고(告, 알림)하얏는바 2일간 관중이 무려 1000명의 성황을…” 대구청년회가 주최해 11월19일부터 이틀간 칠성정(七星町, 지금의 대구 북구 칠성동) 대구 철도국 운동장에서 열린 대구소년야구대회에서 불교군이 우승을 차지했다는 내용이다. 1921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군(軍)은 지금으로 치면 팀(team)에 해당하는 용어로, (대구)조선불교청년회 소년야구부(이하 불교소년야구단)가 일제강점기에 활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소년야구부는 지금의 리틀야구단으로 당시 대구불교계의 체육 활동 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당시 대구소년야구대회에는 불교군 외에도 해성체육단(海星體育團), 광진단(光進團), 해성학교(海星學校), 희원학교(喜媛學校), 무광단(武光團) 등 6팀이 출전해 자웅을 겨뤘다. 대회 첫날 불교소년야구단은 해성학교와 대결해 승리한 후 이튿날 희원학교와 결승전을 치렀다. 1시간 30분 소요된 결승전에 대해 당시 언론에서는 용전(勇戰, 용감하게 싸움)을 펼쳤다고 보도해 치열한 승부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소년야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불교소년야구단은 우승기를 앞세우고 자동차 2대에 나눠탄 채 시내(大邱府, 대구부)를 일주하며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이후 낙천식당(樂天食堂)에서 만찬을 갖고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이에 앞서 같은 해 8월 대구청년회 주최로 계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연합야구대회’에서 불교야구단은 2연패의 아픔을 겪었다. 불교소년야구단과 해성체육단(海星體育團), 체진단(體進團) 등 3개 팀이 참여한 대회에서 첫날 해성체육단과 3시간 가량 용전(勇戰)을 펼쳤지만 대패(大敗)를 당했다. 다음 날에는 체진단과 무려 4시간의 열전을 벌였지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우승을 차지한 체진단 야구팀이 13세 이상, 18세 이하의 선수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 소년야구대회였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소년야구단은 이보다 앞서 원정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1920년 8월11일 경남 밀양에서 밀양소년야구단과 시합한 결과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소년야구단은 늦어도 1920년대 초반, 빠르면 1910년대 후반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은 밀양 경기에서 “대승첩(大勝捷, 크게 이김)을 득(得)하고 … 의기양양이 개선가(凱旋歌)를 부르면서 귀구(歸邱,대구로 돌아옴) 하였는데…”라고 보도하고 있다. 점수를 얼마나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기사를 통해 당시 불교소년야구단의 선수 구성과 주장은 확인 가능하다. 이에 따르면 불교소년야구단은 연령 10세 이상, 15세 이하의 소학교(小學校) 학생으로 조직했다. 즉 대구 지역 소학교 학생 가운데 야구에 소질있는 선수를 선발해 팀을 구성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의 주장(主張)에 해당하는 단장(團長)은 서수명(徐壽命, 14세)이었으며, 원정 경기에 나선 불교소년야구단 선수는 모두 9명이었다. 이에 비해 밀양소년야구단 선수들은 15세에서 22세 이하의 청소년들로 만들어졌다. 당시 언론은 “15세 이내의 아동으로 야구를 원정(遠征)한 일은 우리 운동계를 위하여 기뻐할 일이며, 대구로서는 처음 되는 일이라 하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불교소년야구단은 오전 7시 기차로 출발해 경기를 치르고 당일 오후 10시 대구로 돌아왔다.

불교소년야구단의 정확한 창단 시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21년 여름에 두 차례 경기를 모두 졌지만, 그해 가을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소년야구단의 정식 명칭은 ‘조선불교청년회 소년야구부’였다. 하지만 중앙 (전국) 단위의 팀은 아니고, 대구지역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직한 야구단이다. 당시 대구불교청년회장은 백석기(白奭基)라는 재가불자로 야구단 운영을 주도할 만큼 상당한 재력을 지닌 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초반에 자동차를 두 대나 전세 내어 카퍼레이드를 한다는 것은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충분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구지역 청년불자들은 1920년 6월27일 (경북지역) 조선불교청년회를 출범한다. 대구부(大邱府) 덕산정(德山町) 선종(禪宗) 경북포교당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발기총회를 갖고 임원을 구성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열띤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됐다. 이때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백석기(白奭基), 부회장 김내명(金乃明), 총무 이관우(李觀雨), 종교부장 김재규(金在奎), 교육부장 서병길 (徐丙吉), 체육부장 곽병학(郭秉鶴), 서기 차운(車運), 회계 백덕기(白德基), 간사 이갑동(李甲東), 김태인(金泰仁), 정종식(鄭宗植), 의사장(議事長) 김내명(金乃明), 의사원(議事員) 김재규, 곽병학, 서병길, 홍종두(洪鍾斗), 이봉우 (李奉雨), 김정규(金呈奎), 박의조(朴儀祚), 김태인, 백련기(白鍊基).

이날 총회에서는 청년회 사업 내용도 선정했는데, 소년야구단 운영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원으로 체육부장을 선출한 것은 불교청년회가 체육활동을 활발하게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또한 임원 명단을 살펴보면 백석기 회장과 인척으로 보이는 백덕기 회계와 백련기 의사원이 들어있는 것을 볼 때 백 회장이 불교청년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조선불교청년회는 1912년 5월 경북포교당에서 총회를 개최해 임원을 일부 보완했다. 회장은 유임하고 부회장은 서병룡(徐丙龍), 총무는 김재달, 종교부장은 서병길, 교육부장 백련기, 체육부장 곽병학을 선임했다. 한편 백석기 회장은 1937년 9월(음력)에 작성된 ‘조선불교교총본산 대웅전 상량문’에 이름이 등장한다. 상량문 연화질(緣化秩)에 남주희(南周熙), 이룡경(李龍景)과 함께 수록된 것으로 보아 대구 불교계는 물론 경성까지 영향력을 미친 전국적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밝혔듯이 불교소년단 운영의 주체이자 후원자는 백석기 회장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체육팀을 만들어 운영하려면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백석기 회장에 대한 자료는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회적 활동을 했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일제강점기 자료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1920년 9월 대구지역에 수해가 발생했을 당시 그는 대구지역 인사들과 함께 경북지역의 수재민 구호활동에 참여한다. 경북지역을 강타한 ‘악우(惡雨)’로 막대한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때 수재민 구호활동에 나선 대구경북지역 유지들은 ‘수해구제취지서(水害救濟趣旨書)’를 발표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은 백석기 회장의 사회적 인식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해구제취지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생명을 근보(僅保, 겨우 유지)한 수천 남녀 노유(老幼, 노인과 어린이)는 무의무식(無衣無食)하며 … 부모를 통곡하며 행위불명(行衛不明, 행방이 묘연)의 자녀를 애호(哀呼, 슬프게 부름)하야 풍찬노숙(風餐露宿)에 … 본(本) 발기인(發起人) 등은 동정(同情)의 누(淚,눈물)를 금치 못하야 … 동포에게 구제의 성(誠, 정성)을 표(表)코저 본 구제회를 조직하고 급곤중의(急困重義)하시는 인인군자(仁人君子, 어질고 덕행이 있는 이)에게 근고(謹告, 삼가 알림)하오니 행사자비(幸賜慈悲, 자비를 베풀어 주기 바람)하야 …”

백석기 회장은 대구지역에서 사회적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1920년 7월 달성기독교회와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대구청년회관에서 개최한 강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백석기 불교청년회장을 비롯해 김구(金坵) 달성기독교회장, 최종철 대구청년회장, 한익동 동아일보 대구지국장 등이 연사로 나와 강연을 했다. 당시 신문은 “일반 방청자에게 무한한 흥분을 여(與,주어)하야 만장갈채(滿場喝采)”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그는 상업강습소야학부(商業講習所夜學部)를 수창학교(壽昌學校) 또는 보통학교(普通學校)에 설치할 것을 추진했다. 불교청년회 서병길 교육부장과 함께 대구지역 은행의 직원들을 강사로 참여시킬 계획을 세웠으며, 첫 강사로 대구고등보통학교장인 다카하시 토로우(高橋亨)를 초빙했다. 다카하시는 훗날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 교장을 역임한 일본인 사학자이다.

한편 백석기 회장은 대구지역 독립운동에도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대구 부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결사대(獨立運動決死隊)의 김석주 외 7명이 체포된다. 이들은 “일찍이 백석기에게 (결사대) 단장이 되어주기를 간청했다가 마침내 거절당한 일도 있다”고 밝혔다. 추후 정밀한 확인이 필요하지만, 독립운동결사대 단장 요청을 받은 것만을 보면 백석기 회장이 독립지사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한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구불교청년회의 불교소년야구단 운영은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야구사 서적으로 1932년 일본인 오시마가쓰타로(大島勝太郞)가 지은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사를 연구하는 김일수 금오공대 교수는 “백석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본다”면서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지방도시인 대구에서 소년야구단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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