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중국 아미산

금오대(金五臺), 은보타(銀普陀)에 이어 동아미(銅峨眉)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아미산은 오대산, 보타산,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불교 4대 성지 가운데 한 곳이다. 오대산, 보타산에 이어 세 번째로 평가받지만 아미산의 아름다움은 다른 곳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중국 시선(詩仙)으로 평가받는 이백은 ‘촉국엔 선산(仙山)이 많지만 아미산에 비할 바 아니구나(蜀國多仙山, 峨眉邈難匹)’라는 시로 아미산의 절경을 노래한 바 있다. 경치가 아름답고 수려하다고 해서 중국인들은 아미산을 가리켜 수갑천하(秀甲天下), 아미천하수(峨眉天下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름다운 경치 못지않게 수많은 사찰이 위치하고 있어 많은 불자들이 아미산을 순례한다.

‘수갑천하’ ‘아미천하수’ 별칭

금정, 만년사, 낙산대불 등

자연과 어우러져 불교 꽃피워

불자·일반인 관광객 줄이어

높이 3092m에 달하는 아미산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도량이다. 5000여 종의 식물과 23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1996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아미산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성스러운 곳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융성하면서 아미산 역시 불교성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미산에 위치한 복호사는 도교사원으로 창건된 곳이었으나 사찰로 바뀌었으며, 보국사와 만년사, 금정사, 우심사 등 중국에서도 이름난 절이 많이 위치해 있다. 서기 1세기 경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곳 역시 아미산이다.

아미산 정상에는 아미산의 상징인 금정(金頂)이 찬란한 금빛을 뽐내며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주원장의 아들은 당시 황금 3000량을 하사해 기와, 기둥, 창살 등에 모두 금으로 입혀 사찰을 건립했다. 이 때문에 금정이라고 부른다. 당시 금정은 청대에 이르러 불타 없어졌고, 현재 모습은 1990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금정과 함께 와운선원(臥雲禪院)을 은전(銀展), 화장사(華藏寺) 대웅보전을 동전(銅展)이라고 부른다. 화장사 대웅보전 바로 옆으로 높이 48m의 황금으로 입혀진 아미산 사면시방보현좌상(四面十方普賢座像)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사면시방보현보살상은 높이 48m, 무게 660ton에 이르는 세계최대 규모로 보현보살이 코끼리와 연꽃장식의 좌대위에 앉아있는 형상으로 하고 있다. 좌대 높이만 6m, 길이와 너비는 각각 27m에 달한다. 사면에는 보현보살의 10가지 행원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보현보살의 드넓은 행원이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에게 미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일출이 장관이며 서쪽 암벽위에 위치한 만불정을 바라보는 전경이 일품이다. 특히 운해(雲海), 일출(日出), 불광(佛光), 성등(聖燈)은 아미산에 오르면 반드시 봐야할 4대 기경으로 꼽히고 있다.

만년사(萬年寺) 역시 아미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보현보살상, 부처님 치아사리 등이 봉안된 대표적인 보현도량이다. 401년에 창건된 사찰로 중국 동진(東晋) 고승 혜지스님이 창건했다. 보현보살상이 봉안돼 보현사라고 불렀다. 당나라 때 혜통스님이 중건해 다시 백수사로 불리다가 명나라 이후 만년사로 개명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만년사에는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조각이 있는데 높이가 7.35m, 무게도 62ton에 달한다. 979년에 조성되었는데 수차례 화마에도 불구하고 소실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만년사는 1600년에 중건된 것으로, 화재를 대비하기 위하여 벽돌로 무량전(無梁殿)을 건립했다. 400여 년간 18차례 이상 발생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건재하고 있어 중국불교 건축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전각 안에는 보현보살을 모셨으며, 보살 양쪽 측면과 상부에는 모두 3000개의 철불과 12개의 금인(金人)이 있다. 

찬란한 금빛을 자랑하는 아미산의 상징, 금정.

아미산 입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보국사(報國寺)는 아미산 보현사상을 상징하는 총본산격인 사찰이다. 명(明) 만력제 때인 1615년에 세워졌으며 원래 이름은 회종당(會宗堂)이었다. 창건 당시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사원이었으나 청나라 강희제 때 복원한 이후 사찰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보국사로 개명됐다. 이후 두차례의 확장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30년대 일제 침공을 피해 중경(重慶)에 와있던 장개석(蔣介石) 역시 보국사를 자주 참배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과 칠불을 봉안한 칠불전, 보현보살을 모신 보현전이 대표적인 전각이다.

아미산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낙산대불도 불자들이 자주 찾는 성지이다. 능운대불(凌雲大佛)이라고도 불리는 낙산대불은 능운산 서쪽 암벽을 통째로 잘라내 새긴 마애석불로, 사천분지 남서부 민강(岷江), 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 등 3개의 강 합류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두발을 강물에 담그고 두 손은 무릎에 얹고 안온한 표정으로 산과 나란히 앉아 있는 낙산대불은 높이 70m, 어깨넓이 20m 규모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당나라 때 능운사(凌雲寺) 해통스님이 세 강물의 합수목인 이 곳에서 늘 사고가 빈발하는 것을 보고 배가 안전하게 지나다니기를 기원하며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713년 시작된 대작불사는 해통스님 입적 후에도 절도사 장구겸경(章仇兼)과 위고(韋皐)에 의해 불사는 이어졌고, 장장 90년에 걸쳐 불사가 진행된 끝에 803년에 완공됐다. 낙산대불이 완공된 이후에는 부처님 가피로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각 당시에는 금빛과 화려한 빛깔로 장식했고 13층 목조 누각으로 덮어 대불을 보호했으나 누각은 명나라 말기에 불에 타 없어졌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며, 현재 불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관광객들도 앞다퉈 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대불 뒤편에 위치한 능운사는 7세기 후반에 창건된 사찰로, 17세기에 중수해 현재의 모습

높이 70M의 웅장한 낙산대불.

을 갖추게 됐다. 낙산대불을 모시고 있어 대불사(大佛寺)라고도 불린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뒤로 천왕전과 장경루가 있고, 해통스님이 수련했다는 동굴인 해사동과 스님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낙산대불로 내려가는 곳에는 경수정(競秀亭)을 비롯한 정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자료협조= 대승투어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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