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제월당(霽月堂) 통광(通光) 대선사

“선·교겸수 유불선 통달한 대선사”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지리산 칠불사

20여년 걸쳐 중창, ‘亞’자방 유명

출·재가 교화…수많은 제자 양성

 

“사찰 불사 말고 공부 더 했으면…”

아쉬워하던 대강백 탄허스님도

통광스님 학문 깊이 ‘인정’

통광스님의 상좌들은 스승의 사진을 걸어두고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사진은 한 상좌의 방에 놓인 스님의 액자사진.

 

제월당(霽月堂) 통광(通光) 대선사(1940~ 2013)는 불교의 경학에 밝고 뚜렷한 안목을 지녔으며 참선수행에도 깊은 선지(禪旨)를 터득했다. 경전연구와 참선을 함께 연찬하는 선교겸수에 빼어났다.

그런가하면 유학공부도 깊어 한문의 문리를 훤히 익혀 불경공부에 어려움이 없었다. 조사어록을 보는데도 깊은 안목을 지녔다. 스님은 또한 노장사상도 깊이 탐구했다. 통광스님의 사상체계는 이렇듯 유교 불교 도교에 깊고 넓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통광스님은 스스로 닦은 내적인 수행력을 바탕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불사도 크게 했다.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천년고찰 지리산 칠불사를 중창하여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궈놓았다. 중창불사는 세계 건축사에서도 유명한 아자방(亞字房)을 비롯해 대웅전, 운상선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채 등 근 20년에 걸쳐 이룩한 대작불사다.

스님은 출가 재가자의 교화에 평생토록 힘을 기울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통광스님은 출가수행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이렇듯 생전에 이뤄놓음으로써 숱한 불자들에게 ‘수행자의 본분 삶’을 내보였다.

통광스님은 1940년 7월26일(음력) 경남 하동군 화계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 태어났다. 의신마을은 칠불사 아랫마을이다. 한학에 밝은 아버지 우양명(禹亮命) 거사와 어머니 박부금(朴富今) 보살의 3남1녀 가운데 3남이다. 어려서부터 사서삼경과 한시 등을 두루 익혔으며 1958년 지리산 연곡사 서굴암에서 세속 학문을 공부하다 당시 그 곳에서 수행하던 여환(如幻)스님의 영향으로 크게 발심, 출가수행자의 길을 자신의 평생 진로로 택했다.

1959년 범어사에서 여환스님을 은사로, 명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3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아 지녔다. 1963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범어사 선방을 비롯하여 전국의 선방에서 10여년을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1975년 동국역경원 연수원을 수료했으며 1977년에는 탄허스님으로부터 전법, 제월(霽月)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칠불사 중창불사는 1978년에 시작하여 1998년에 이르러서 거의 마무리지었다. 1987년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수료하고 1997~1999년 쌍계사 본·말사 사암연합회장, 1998~2012년 쌍계사 승가대학장, 1999년에는 쌍계사 주지를 역임하고 칠불사로 돌아와 회주로 있었다. 2007년에는 조계종 역경위원장을 지냈다.

2013년 9월6일 아자방에서 좌선자세로 입적하니 법랍 54세요, 세수 74세다. 장례는 2013년 9월10일 문도장으로 엄수됐다.

1983년 43세 때 <고봉화상 선요·어록>을 번역, 강설하여 출간하고 1996년 <초의다선집>을 펴냈다. 2005년 <진감선사대공탑 비문>을 번역했으며 2008년 <증도가 언기 주>를 펴냈다. 열반 후 2015년 ‘장자 감산 주’를 현토 국역한 책을 문도들이 펴냈다.

“통광이 칠불 복원 중창에 쏟은 열과 성을 학문연찬과 참선수행에 매진하는데 썼으면….” 탄허스님이 통광스님을 두고 한 말이라 한다. 통광스님에게는 칠불암의 복원이 대원력이었다. 문수도량으로 알려진 칠불암, 아자방으로 세계적인 보물인 칠불암이 전쟁으로 인해 폐허처럼 된 그 모습이 통광스님에게는 너무나 마음 아픈 것이었다. 게다가 그 허허로운 도량에서도 천막법당에서 수행정진에 몸을 바치고 있는 스님들을 보면서 통광스님의 원력은 더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더욱이 이 곳이 내 고향이 아닌가.

통광스님은 이 원력을 다지기 위해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가피력으로 화주가 되어 전국을 누볐다. 칠불암은 교통이 편한 곳이 아니다. 지리산 첩첩산골의 절이다. 또한 손 크고 재력있고, 든든한 단월(檀越)이 있는 절도 아니었다. 혈혈단신으로 시주에 나섰다. 기둥 하나, 석축의 돌 하나도 예사로울 수가 없었다. 오로지 신심과 원력이었다. 마을사람들도 자기들의 불심을 스님의 원력에 더했다. 원력을 크게 갖고 있으나 일은 서둘지 않았다. ‘돈 생기면 하나 하고 그러다 또 생기면 하나 하고’ 그렇게 불사를 해나갔다. 나무를 다듬는 목공이나 돌을 쪼는 석공들, 모래 시멘트를 이고 지며 나르는 일꾼들, 마을 사람들도 길이 멀고 험하고 힘에 부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님을 도왔다.

오늘의 칠불사는 이렇게 이루어진 대도량이다. 그래서 ‘기적의 불사’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 불사에 몸과 마음을 다해 크게 기여한 불자들을 위한 커다란 비석 하나 세울 법한 일이다. ‘칠불 불사에 전념하지만 않았어도…’라고 한 탄허스님도 통광스님의 학문에는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통광스님이 불사의 대원력을 이루어나가면서도 선교겸전의 수행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는 걸 익히 알기에 탄허스님이 당신의 전법제자로 삼은 게 아닌가.

출가수행자의 본분사를 잠시도 잊지 않은 통광스님, 스님의 이러한 학문탐구 정신은 당신이 낸 책에서도 익히 볼 수 있다. “6·25 전란으로 모두 불탄 지리산 칠불사의 복원 불사에 나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쳐 15~16년간의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야 겨우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본분사에 소홀해지고 교학 또한 소원해진 감이 없지 않다. 이제 칠불사의 복원불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오늘, 지난날 역경에 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다시 옛 초고의 정리를 거듭하고 그 밖의 조사어록을 들춰보며 이제는 내면의 삶에 충실하고 본원(本願)을 실현시켜야 겠다고 새로운 다짐을 하였다. (<고봉화상 선요· 어록> 서문)

“장자를 읽으려면 반드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을 정독하여 문장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선종의 견지(見地)를 깨침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갖추어진 뒤에야 ‘장자’의 말과 뜻의 귀결처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번 현토(懸吐) ·주(註)는 장자의 사상을 선종의 돈오사상을 기조로 승화한 감산스님(山,1546~1623, 명나라 말 고승)의 마음을 내보이고자 한 것이다.”(장자 감산 주 국역·현토) 이렇듯 통광스님의 내면세계는 유 불 선에 관통했다.

통광스님의 스승에 대한 예와 효는 극진하기 이를데 없어 ‘효상좌’라 불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통광스님의 상좌들도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통광스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강백으로, 선원장으로, 주지로 각각 제 맡은 바를 다하고 있다. “금생에 공부해서 도를 통해야 해. 나는 사판의 일도 해 보았지만 별게 아니었어. 주지 할 생각 말고 운상선원을 지키면서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 해야 해.” 선원장으로 있는 상좌에게 당부한 스승의 말이다.

“병원에서도 선정에 들었던 분”

도올 김용옥, 삼배 올리며 흠모

“교학을 모르는 수행, 수행이 없는 교학의 한계를 넘어 교학과 수행을 두루하는 선교쌍조(禪敎雙照)의 사상체계를 이룬 스님이 통광스님이다.”(통광불교연구원 우제선 교수)

통광스님과 당대의 석학 도올 김용옥의 만남은 일화로 전해져 통광스님의 학문에 대한 깊이와 안목을 새삼 알게 해주고 있다. 1986년 5월 도올과의 대화다. 도올이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냈을 때라 한다. 쌍계사 국사암에 들른 도올이 통광스님을 만나 자리를 같이했다.

도올이 그 책을 통광스님에게 보이자 통광스님이 한마디 했다. “여자얘기를 하려면 노자 <도덕경>의 현빈을 알아야지.” 도올이 깜짝 놀라 “스님이 현빈을 어이 아십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고 도올은 통광스님이 지닌 학문의 세계에 대한 흠모일게다. 벌떡 일어난 도올이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한달 뒤 머리 깎으러 오겠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했단다.

“현빈(玄牝)의 현은 심원(深遠), 빈은 암컷의 성질로서 만물을 파생시키는 본원을 가리킨다. ‘노자’ 6장에 ‘현빈의 문(門)을 일러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라고 하여 도가 미묘한 모체(母體)와 닮아 천지만물의 근본임을 말하였다.”(김승동 편저, 부산대 출판부, <도교사상사전>)

누구든 와서 묻는 사람을 좋아한 스님,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고 사람들 흉을 보거나 욕을 하거나 하는 일이 없는 스님, 한 밤 중에도 손전등을 들고 공사현장을 돌아본 스님, 새벽에 선방에서 좌선하고 내려오신 스님에게 “컨디션이 어떠하십니까” 하면 “응, 성성하더라”고 한 스님, 말년에 병원에서도 선정에 들어 문병온 도반이 그냥 간 일, 친정아버지 같은 스님. 통광스님이 가고난 뒤 후학들은 스님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도움말: 무비스님, 진현스님, 자응스님, 도응스님,

노불스님, 공병수 거사, 명성 보살

사진제공: 제월당 통광대선사 문도회.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