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내 폭염이 이어지는 날들입니다. 어디 그늘을 찾지만 그늘 역시 더위에 점령당했습니다. 처서가 지났어도 폭염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물속에 들어가 놀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너럭바위에서 물을 향해 겁도 없이 다이빙을 하고 다시 너럭바위에 누워 몸을 말리던 날들. 때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날들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위에 누워 있으면 따가운 햇살과 함께 찾아오던 그 시원한 바람. 숲이 그렇게 시원한 바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릴 적에 알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숲 속에 들어 살면서 삶을 시원하게 해주는 바람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유년의 바람이 몸을 말리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바람은 번뇌를 날리고 삶의 체증을 뚫어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람의 진화인지 내 의식의 진화인지 모르겠지만 바람은 그렇게 내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절 일주문 앞에 바랑을 메고 선 객승의 바랑 위로 날리던 눈보라.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버스는 오지 않고 눈발만 날리던 길게 이어진 도로. 객승은 어디 먼 곳을 보는지 그 시선 위로도 눈보라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잔한 고독으로 내 가슴에 그려졌습니다.

여름날의 바람 속에서 동무들과 몸을 말리며 웃다가 겨울날의 바람 속을 나는 홀로 걸어서 산중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함께 웃어줄 동무가 없습니다. 대신 바람이 불 때마다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깊은 언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삶은 외로운 것이고 존재는 형체 없이 사라져 마침내 바람이 된다는 바람의 노래들이 내 삶의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오래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자유와 그 푸른 외로움은 아직 나의 것이 아닙니다. 아직 그 옛날 일주문 앞에서 보았던 수행자의 깊은 고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대 고독이 아니면 절대 수행도 없다던 은사 스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여전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무더위 속 눈 감고 내 유년의 바람으로 부터 지금의 바람으로 날아온 길을 돌아봅니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못다한 바람의 노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교신문3229호/2016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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