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그저 바라보고

분석하는 나의 오래된 습관을

버려야겠다

맑은 향기 내뿜는 연꽃을 보며

군자향도 느껴보고

물을 비워낼 줄 아는

연잎을 보면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지만, 요즘 저녁마다 강남 봉은사에 피서하러 간다.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는 절에 들어가는 것이 뭐가 미안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불보다도 입구부터 놓여 있는 흐드러진 연꽃을 구경하러 가는 것 같아 못내 미안한 마음이다. 지금 봉은사에서는 연꽃축제가 한창이다. 더욱이 저녁에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 꽃대를 끌어당겨 향기를 맡는 나만의 즐거움도 조용히 누릴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연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즐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불상 공부를 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봤던 것이 연꽃이다. 물론 불상의 광배나 대좌 장식으로 표현된 연꽃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연꽃을 그저 보는, 분석하는 대상이라고만 여기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연꽃이라고 하면, 누구나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가(佛家)에서는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맑음을 잃지 않는다는 ‘처렴상정(處染常淨)’을 연꽃의 성품에 비유한다.
사실 연꽃은 불교의 꽃이 되기 훨씬 전부터 서양 고대 사람들이 ‘생명 탄생’이나 ‘태양’과 ‘희망’의 꽃으로 여겨 왔다. 일부 학자들은 생명 탄생과 관련되는 이 꽃을 불가에서 차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연꽃은 이제 불교의 대표적인 꽃이 됐지만, 과거엔 유가(儒家)에서도 소중한 꽃으로 생각했다. 유학자들은 연꽃이야말로 군자(君子)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북송시대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 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시는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주돈이는 이 시에서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국화를, 당나라 사람들이 모란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특별히 연꽃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내가 유독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때가 묻지 않았고/ 맑은 물로 씻어도 요염하지 않기 때문이다./ 꽃대의 속이 비어 있고 겉은 곧으며 덩굴도 가지도 없지만/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더 맑다./ 언제나 꼿꼿하고 조촐히 서 있으니,/ 가히 멀리서 바라볼 뿐 업신여기거나 가지고 놀 수가 없다.”
실제로 연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군자향(君子香)을 노래했던 주돈이의 시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애련설’의 영향으로 애련지(愛蓮池)나 애련정(愛蓮亭)이 여러 곳에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 숙종 18년(1692)에 조성한 창덕궁(昌德宮)의 애련지와 애련정이 대표적인 예다.

주돈이의 시를 음미하면서 연꽃과 그 자태를 감상하다 보면, 시선은 이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독특한 형태의 연잎으로 옮겨 와 있다. 비가 오면, 연잎에 물이 가득차지만 잎사귀가 찢어지지 않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물을 미련 없이 비워버리기 때문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동시에 떠오른다.

연꽃 피는 계절이다. 이제 연꽃을 그저 바라보고 분석하는 나의 오래된 습관을 버려야겠다. 맑은 향기 내뿜는 연꽃을 보며 군자향도 느껴보고, 물을 비워낼 줄 아는 연잎을 보면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정말 연꽃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불교신문3228호/2016년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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