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명사들과의 인연

 

有而使無者心

無而使有者影

无固不妨

有夾非幸

月在秋潭

松挺霜岡

是吾師之眞

何必問一幅有亡

있어도 부릴 수 없는 것은 마음

없어도 부릴 수 있는 것은 그림자

없어도 무방하고

있다고 다행인 것은 아니다.

달은 가을 연못에 있고

소나무는 산등성에 있다.

이는 우리 스님의 진영이다

하필 한 폭이 있고 없고를 묻는가?

 

1779년에 번암(樊岩) 채백규(蔡伯規, 1720~1799)가 해인사의 화봉조원(華峰照源, 1761년 활동) 선사를 위해 지은 영찬이다. 화봉스님은 부휴선수의 6세손으로 벽암각성-모운진언-보광원민(光圓敏)-회암정혜(晦庵定慧, 1685~1741)의 법맥을 계승했다. 1744년에 김천 쌍계사에 세워진 회암정혜스님 비(碑)에도 회암문인(晦庵門人)으로 스님의 법명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후기에 부휴문중은 여러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가야산, 불령산, 황악산 등지에서는 모운진언의 후손인 회암문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화봉스님에 관한 자세한 행장은 전하지 않지만 1761년에 해인사 백련암에 모실 불상 5구를 조성하기 위해 화주(化主)로 활동한 기록과 회암문중 출신인 추파홍유(秋波泓宥, 1718~1774)의 <추파집(秋波集)>에 가야산에 계신 화봉스님에게 올린 글이 남아 있다. 이런 단편적인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해인사에 모셔진 화봉스님의 진영에 적힌 영찬은 당시 불교계를 넘어 사대부에게 알려진 스님의 위상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찬자(撰者)인 채백규는 영·정조 때 문신이자 정치가, 그리고 예술계의 후원자로 유명한 채제공(蔡濟恭)의 또다른 이름이다. 채제공은 스님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지 그의 문집인 <번암집(樊岩集)>에는 화봉스님 외에도 해봉유기(海峰有璣), 문곡영해(文谷永誨), 추파홍유, 봉암채흔(鳳巖采歡) 등 여러 스님의 영찬과 비문이 실려 있다.

화봉스님의 영찬은 예서(隸書)로 적혀 있으며 이를 쓴 이는 송하(松下) 조치행(曹톆行)이다. 조치행의 예자(隸字)는 상당히 유명했는지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옥을 쪼아 솥을 만들고 그의 예자로 석정연구(石鼎聯句)를 썼다는 일화가 여러 사대부 문집에 전한다. 이처럼 화봉스님의 영찬에는 지금은 잊혀진 18세기 후반 불가와 속가의 여러 명사들의 인연이 담겨 있다.

[불교신문3228호/2016년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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