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한 권 들고 떠나는 경주순례

효의 상징 불국사 석굴암

전생 현생 부모위해 창건

대웅전 앞 석가탑 다보탑

통일신라 석탑 정수 상징

 

한국불교사 유일한 순교자

이차돈비 전해져온 백률사

사면에 불보살상 새겨놓은

굴불사 석조사면석불 눈길

 

문무왕수중릉 대왕암 보고

웅장한 감은사탑 순례하면

신라불교사 순식간에 이해

해체 후 보존처리 작업에 들어갔던 불국사 석가탑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효의 상징, 불국사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불국사는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보 20호 다보탑과 21호 석가탑은 한국 석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보다. 두 탑은 <화엄경> ‘견보탑품’의 내용을 사찰 건축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해체 후 보존처리작업을 끝내고 복원된 석가탑은 단정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주변정비가 진행 중이지만 신라 장인의 손길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10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다보탑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조선후기 건축의 화려한 장식성을 보여주는 대웅전, 2007년 황금돼지가 발견돼 화제가 됐던 극락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책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효를 상징하는 도량이다. <삼국유사> 제5권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 따르면 모량리에 경조라는 이름의 여인에게 대성(大城)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살림이 어려워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흥륜사 법회에 보시할 정도로 신심은 깊은 집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었는데, 재상 김문량의 집에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너희 집에 태어날 것’이라는 외침이 들렸다고 한다. 과연 아이를 낳으니 왼손에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金簡子) 쥔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머니를 함께 봉양했다.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서 곰을 한 마리 잡았다. 그날 밤 꿈에 곰이 나와 생명을 앗아간 그를 원망하며, 자신을 위한 절을 지어주지 않으면 환생해 대성을 죽이겠다는 말을 남겼다. 두려웠던 대성은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짓고, 그 때부터 발심해 불사에 참여하게 된다.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현 석굴암)를 세워 신림과 표훈스님을 주석케 했다. 절의 기록에 따르면 경덕왕(재위 742~765)대에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天寶)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세우기 시작해 혜공왕대(재위 765∼780)를 지나 대력(大曆) 9년 갑인(774) 12월2일에 대성이 죽어 국가에서 이를 완성했다고 한다.

# 이차돈 순교와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

백률사는 국보 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 순교비가 전해진 곳이다.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유일하게 기록되는 순교자 이차돈(506~527)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편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滅身)’조에는 염촉 즉 이차돈의 희생으로 신라의 불교공인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본기>에 법흥왕(재위 514~540) 14년 이차돈이 불교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원화(元和) 연간(806~820) 남간사 일념스님이 ‘촉향분예불결사문’에 남겼고, 일연스님이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법흥왕은 사찰을 짓고 부처님 법을 널리 펴길 원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한탄했다. 그 때 조정의 낮은 벼슬인 사인(舍人)의 이차돈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신하의 절개라며, 자신을 참수하면 백성들 누구 하나 왕의 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방안을 제시했다.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없다는 법흥왕에게 이차돈은 “목숨이야 말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나 자신은 저녁에 죽더라도 아침에 불법이 행해지면 부처님의 해가 뜨고 왕의 길이 편안해질 것”이라고 고했다. 이차돈의 뜻을 받아들인 왕은 군신을 불러 모은 뒤 ‘사찰불사를 고의로 지체시킨다’는 이유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목에서 흰 젖이 솟아올랐고, 땅은 진동하고 캄캄한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 이차돈의 보살행을 찬탄하며 눈물짓던 왕은 시신을 수습해 금강산에 장사를 지내고, 좋은 곳에 사찰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子推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백률사를 자추사의 후신으로 보는 것은 순교비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백률사 성보들은 일제강점기 때 제자리를 떠나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헌덕왕 9년(817)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차돈 순교비는 제3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육각형으로 한 면에는 책의 기록처럼 이차돈의 목에서 흰 젖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줄을 긋고 칸마다 글자를 새겼다. 높이 177cm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두 손은 모두 잃어버렸지만, 현존하는 가장 큰 통일신라금동불상이기도 하다.

# 굴불사지 사면석불

굴불사지 사면석불.

사방불은 동서남북 어느 곳에나 부처님께서 상주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돼 조성됐는데, 밀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금광명경> 등에서 경전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사방불로는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과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꼽을 수 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백률사를 내려오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편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에 따르면 경덕왕(재위 ?∼765)이 백률사로 놀러갔는데 산 밑에 닿으니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났다고 한다. 염불소리가 나는 곳을 파보니 그곳에 큰 돌이 묻혀 있었는데 돌을 꺼내 보니 사면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부처님을 파냈다는 뜻의 굴불사(掘佛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보물 121호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이름처럼 큰 바위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에는 삼존불이 조각돼 있는데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부처님이다. 이는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을 토대로 확인할 수 있으며, 훼손된 보살상은 세지보살로 추정된다. 동쪽에는 약사불이 왼손에 구슬을 들고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다. 얼굴과 몸통이 다리보다 더 높게 튀어나오게 조각된 게 특징이다. 북쪽과 남쪽에는 각각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북면의 경우 오른편엔 서 있는 보살상이 부조로 조각됐고, 그 옆에는 선각으로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풍화돼 자세한 모양을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이라고 전해진다. 남면에는 두 구의 보살상이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발밑에는 별도로 조성된 연화대좌가 각각 놓여 있다.

# 감은사지와 대왕암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재위 661∼681)과 관련된 유적이 대왕암과 감은사지다. <삼국유사> 권3 ‘기이’편 ‘문무왕 법민’조를 보면, 왕은 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큰 용이 돼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영융 1년(681)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위에 장사를 지냈다. 또 ‘만파식적’조에 보면 신문왕이 개요(開耀) 원년(681)에 왕위에 올랐는데,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에 감은사를 세웠다고 한다.

감포 앞바다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적 158호 대왕암은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남북으로 길게 넓은 돌이 놓여 있는데,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이 봉안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왕암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에 감은사지가 있다. 국보 112호인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은 이중의 기단에 높이 13.4m의 거대한 석탑이지만, 뛰어난 균형미를 보여준다. 동시에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삼층석탑의 원류가 되는 불교성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분황사 모전석탑이 돌로 만들어졌지만 목탑의 양식을 따르는 것과 달리,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구조를 단순화 하고, 탑을 쌓기 위해 필요한 돌의 수도 줄였다. 특히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의 국력과 불심을 보여준다. 사천왕이 표현된 사리외함과 전각형 금동사리내함, 수정사리병 등으로 이뤄진 사리장엄구에는 도금기술, 주물, 돋을새김, 투조 기법 등 금속공예기술이 집약돼 있다.

[불교신문3225호/2016년8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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