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잡이식 비판과 매도는 수행자에게 상처만…

 

기복주의, 종교의 가장 내밀한 시원

‘기복=$돈’이라는 현각스님 지적은

이익추구 가장 적은 불교 매도한 것

성직자와 신도 평등하지만 차등있어

외국 승려는 장식품이라는 비판 등

책임질 수 있는 자세 조속히 보여야

숭산스님 제자인 현각스님이 SNS를 통해 한국불교에 대한 실망을 드러낸 이후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자현스님의 두번째 입장을 게재한다. 자현스님의 기고문 전문은 불교신문 홈페이지(www.ibulgyo.com) 참조.

 

현각스님의 불교비판 중 뒤의 3가지는 한국불교에 대한 지적이다. 이를 환기시켜 주면, ④기복(祈福)주의 ⑤스님과 신도의 차등 ⑥외국승려는 장식품이다.

흔히 기복주의가 나쁘다고 하지만,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복주의는 종교의 가장 내밀한 시원이다. 즉 절대자나 절대적인 힘이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기복이야말로 종교의 기원인 것이다. 기복이 종교의 시작이라는 것은, 이것이 가장 강렬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이다. 실제로 한국불교가 조선 500년의 숭유억불시기를 넘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화려한 교학(敎)’도, ‘빛나는 정신문화(禪)’도 아닌 ‘기복’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조석으로 하는 <예불문>의 ‘명훈가피’라는 단어로 유전되고 있다.

내 말은 기복이 반드시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종교에서 기복은 핵심적인 요소이며, 현재도 모든 종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불교와 함께 세계종교로 평가받는 이슬람과 기독교는, 신에 대한 기복이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물론 현각스님의 지적은 ‘기복=$돈’이라는 의미였다. 즉 한국불교가 너무 돈을 밝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2015년 총 수입이 가장 많은 사찰은, 강남 봉은사로 210억 8700만원이었다. 210억원이면 언 듯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입이 아닌 총수입으로, 순수입은 이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현대의 한전부지 매입으로 봉은사가 수조원의 자산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잘 알려졌다. 시쳇말로 봉은사 주차장에 빌딩만 올려도 임대료가 이런 수입보다 많이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1년 수익규모가 수천억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 금액으로 한국불교가 기복으로 돈을 밝힌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한국종교 중 불교는 가장 이익추구가 적은 청정한 종교이다.

다음으로 스님과 신도의 차등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세상에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성직자와 신도가 완전 평등한 종교가 존재했는가? 이에 대해서 붓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붓다 역시 승가(출가)와 재가를 엄격히 구분했다. 또 출가와 재가에 대한 가르침도 달랐다. 출가자에게는 4성제·8정도·3과설을 주로 가르치셨다면, 재가인에게는 보시·지계·생천의 3론이 일반적인 가르침이었다. 또 보시에 의한 공덕도 재가인보다 출가인에게 하는 것이 더 많으며, 4향4과의 깨침을 얻은 분들이라면 더 크다고 하셨다. 즉 붓다에게서도 승려와 신도의 차등은 존재했던 것이다.

성직자와 신도는 인도자와 인도되는 사람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평등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선생님이 학생과 평등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평등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평등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각각의 생김새는 모두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붓다와 중생은 평등하다. 그러나 동시에 붓다는 높고 중생은 낮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붓다에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난 수십 년간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많은 부분을 외국스님들에게 배려했다. 그러나 일반사찰에서 스님의 역할은 기도와 불공 및 신행상담과 법문이다. 또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사찰이라면, 해당주지는 지역의 유지나 기관장과 교류하며 포교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스님들은 언어문제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와 같은 역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현재까지의 사찰전통 안에서는 외국스님들이 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사찰에 외국스님의 위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사찰의 구조와 기능이 한국승려에게 맞춰져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고민과 대화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종단도 외국스님들도 모두 처음 겪는 생소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각스님의 싸잡이식 비판과 매도는 대다수 성실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런 점에서 현각스님은 모종의 책임질 수 있는 자세를 조속히 보여야만 할 것이다.

[불교신문3224호/2016년8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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