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없는 공덕은 양쪽 모두 이익

자기수행으로 중생을 교화해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해…

육도만행 자리이타는 ‘성불도’

부처님 전생을 전하는 <본생경>을 요약하면 ‘보살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육도만행(六度萬行)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원(願)으로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도를 성불의 바른 원인(菩薩道乃成佛之正因)이라 하는데, 육도만행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바라밀수행이며, 자리이타는 자타를 아울러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도를 이루려는 바라밀수행을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공덕을 쌓는 것이고, 객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로 말미암아 이로움을 입는 것입니다. 누군가 공덕을 쌓고자 선행을 베푸는 행위를 자리(自利)라 하면, 그로 말미암아 이로움을 입는 것은 이타(利他)입니다. 깨달음을 예로 들어 성불(成佛)을 발원(上求佛道)하여 쌓는 선행공덕이 자리(自利)면, 그로 말미암아 중생이 이로워지는 것(下化衆生)이 이타(利他)입니다.

흔히 일방적인 시각으로 불교를 ‘대승소승’으로 나눌 때 자리와 이타 가운데 어느 가치를 우선시하는가를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양분하기란 무리입니다. 그 이유는 <발보리심경론>의 육바라밀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보시’와 ‘지계’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를 닦기 때문에 선한 이름이 유포되어 처하는 곳마다 재물과 보배가 풍요롭게 넘쳐나니, 이를 일러 ‘자리(自利)’라 한다. 또한 능히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교화하고 조복해서 인색하지 않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利他)’라 한다. 또한 이미 닦은 무상(無相)의 크나큰 보시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俱利)’이라 한다.”

“지계를 닦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악과 허물을 멀리 여의어서 항상 좋은 곳에 처하나니, 이를 일러 ‘자리’라 한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악을 범하지 않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 한다. 또한 자기가 닦은 바를 보리의 계(戒)로 돌려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俱利)’이라 한다.” 

양자 모두의 이익인 ‘구리(俱利)’는 ‘광명(光明)’의 의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전에 따르면 ‘광’이란 스스로 빛나는 것이고, ‘명’은 물체를 비추는 것으로 어둠을 헤치고 진리를 나타내는 작용(光明具有破除黑暗 彰顯眞理之作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광명, 즉 진리광명을 쬐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청정(佛光令人心鎭靜淸淨)해지지만 오히려 마음이 들뜨고 정신이 팔려 혼미하다(魔光導致人心浮動恍惚)면 그것은 유혹의 불꽃으로 여겨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광명과 자리이타를 묶어서 말한다면, 부처님의 계율광명(持戒修善之功德能斷除諸惡利益衆生 故稱爲戒光明)으로 중생을 비춤으로써 중생이 깨끗한 행을 실천하게 되고, 지혜광명(智慧具有照見事物眞相之作用 故稱爲智慧光)으로 비춤으로써 중생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양자 모두의 이익인 것입니다.

공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려다 범위가 넓어졌으나 다시 초점을 맞추자면 공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덕으로 전체가 이익이라면 자타의 선후는 입장차이일 뿐입니다. 공덕을 쌓는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자리며 이로운 관점에 서면 다 함께 이타입니다. 그러므로 자리와 이타의 선후기준으로 공덕을 논하려면 일정한 틀 속이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공덕’에 대하여 논할 때 <경덕전등록>의 양 무제와 달마대사의 이야기가 즐겨 인용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양 무제가 “짐이 즉위한 후로 절을 짓고 경전을 펴며 스님들 공양하기를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하였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하자 달마대사는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하면서 “대게 이러한 것은 번뇌를 수반하므로 비록 공덕이 있더라도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人天小果有漏之因 雖有非實)”하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유루와 유위의 공덕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더러 봅니다. 유루 무루에서 ‘루’란 번뇌의 이명(漏爲漏泄之意乃煩惱之異名)으로 유루는 번뇌의 증장이며 무루는 번뇌의 단절입니다.

[불교신문3221호/2016년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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