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 속에 담겨 비로소 얼굴이 되는 얼굴 하나 그대 눈 속에 비쳐 비로소 세계가 되는 얼굴 하나” (김신용의 시, ‘눈부처’ 중에서)

내가 두 번째로 학교를 옮길 때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이 학생은 앞으로 다시는 학교를 옮기지 말아야 해요. 적응을 못 해요.” 왕따라는 말보다 이지메라는 말이 널리 쓰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자주 변기에 처박혔고, 사물함을 열면 모래가 쏟아졌으며, 체육복 등판이 남자애들의 코딱지로 얼룩졌다. 사람의 눈이 무서웠다. 사람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려고 집에 있는 가장 두꺼운 책을 가져와 얼굴을 가리고 길을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 책 밑으로 내가 ‘빛나는 삼각형’이라고 불렀던 공간이 생겨났다. 그 삼각형만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삼각형의 크기만큼이나 참 비좁고도 날카롭던 시절이었다.

30대가 되어 웅크린 10대였던 그 여자애를 생각하니 눈앞에 다시 그 아름답고 슬프던 삼각형이 떠오른다. 책을 얼굴에서 떼고 사람을 만나 그 눈을 들여다보게 되기까지 십 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사람의 눈빛을 배우는 일은 더디고 아름다워서 그 속에 들어 한 시절 헤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이 가진 눈빛의 결과 질감과 룩스(lux)가 각기 달랐다. 나처럼 사람의 눈을 보는 것에 미숙한 눈도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도 있었다. 유독 맑아 내가 잘 비치는 거울 같은 눈동자도 있었다. 그 눈빛들을 시간을 들여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연구했다. 그건 사람을 넓고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했지만, 그 눈 속에 들어 있는 나의 모습을 만나고자 했던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어렸을 적 내가 피하려 했던 것은 그들의 눈동자이기도 했지만 그 눈이 비추는 나의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발견하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의 빛에 반사되는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눈부처’라 부른다고 들었다.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김신용 시인이 시 ‘눈부처’에서 전하듯 “눈 속에 비쳐 비로소 세계가 되는 얼굴”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를 반사하며 각자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다른 이의 눈 속에 들어 부처가 되는 일. 그건 자기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불교신문3221호/2016년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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