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홍경스님

만공스님 모시고 ‘선농일치’ 정신 실천

운허·석암·청담·자운 등 고승과 교류

유불 사상 통달…서예·범패 경지 도달

내원암·석남사 등 전국 사찰에 글 남아

부산 명지 청량사 주석하며 가람 일신

선교(禪敎)는 물론 서예·어산에도 능했던 홍경스님. 글씨는 곳곳에 전하지만 사진은 거의 없다.

홍경(弘經)스님(1899~1971)은 출가한 스님이면서도 유교의 깊은 이치에도 통달하여 유(儒) 불(佛)에 그 학문의 연찬과 수행이 빼어났다.

유학을 숭상하는 사대부 집안에서 자랐기에 출가 전 자연히 학문의 소양을 깊게 했고 출가 후에는 불경에 밝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을 일러 화엄종주(華嚴宗主)라 할 만큼 <화엄경>의 깊고 넓은 이치를 드러냈다. 스님은 또한 서예에도 탁월함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은 스님들의 붓글씨를 도필(道筆)이라거나 선필(禪筆)이라고들 말한다. 이는 스님들 붓글씨가 수행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여겨 그렇게들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경스님 글씨는 내로라하는 유명 서예가들이 인정하는, 정통필법에서 나오는 수작이다. 당대의 서예가 운여(雲如) 김광업(金廣業) 선생(1906~1976)은 “홍경스님의 글을 누가 무어라 하랴”고 했고 원로의원 성파스님도 “홍경스님의 글씨는 도필 선필을 떠나 정통 서예의 정수”라고 한다.

홍경스님에게는 또 하나 특출한 면모가 있다. 범패(梵唄)는 여느 스님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실력이 빼어났다. 특히 경기 범패는 당신이 아니고서는 시연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종단의 어른 영암스님 대의스님도 홍경스님의 범패에 심취하여 배운 바가 크다고 한다. 홍경스님은 당시 종단의 어른들 모임인 여석회(餘石會)의 회원으로 있었으며 말년에는 부산 명지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머물면서 절 면모를 일신시키고 사격을 드높였다. 스님은 교학만이 아니라 선 수행도 깊었다.

妄窮眞露(망궁진로, 거짓이 다하면 진실이 드러난다), 홍경스님의 글씨다.

부산 동래고 앞에서 낙민서예원을 운영하는 우제(愚齊) 박영대 거사는 15세 때부터 8년간 홍경스님 상좌로 있다가 환속했다. 그는 “스님께서는 태산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한다. “학문의 깊이는 어린 내 생각에도 참 깊으시구나로만 알았다”는 우제 거사가 들려주는 일화다. 김해엔 한학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들과 홍경스님은 교류가 잦았다. 선비들은 자주 홍경스님 절에 왔다. “대사 있는가?”하고 들어온 그들과 홍경스님은 글을 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간혹 선비가 말이 막힐 때 스님이 일러주면 “아, 대사님 대단하십니다. 어찌 그리 정확한 문장과 출처를 아십니까?” 했단다. 우제 거사는 “우리 스님이 학문 정리는 확실히 하신 분”이라 한다. 시봉하면서 죽이 된 밥에 반찬이라고는 오이지 뿐인데도, 그런 밥상을 올려도 스님은 “아, 맛있다”했다고 한다.

홍경스님은 평소 농사를 직접 지었다. 아침은 죽을 먹고 저녁은 감자나 고구마로 공양했다. 신도의 복을 비는 불공도 최소화했다. 홍경스님의 출가에 얽힌 일화도 우제 거사는 자기가 들은 얘기라면서 털어놓았다.

홍경스님의 출가는 쉽지 않았다. 절에 가서 출가의 뜻을 밝히자 스님들이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양주 고을에서 널리 알려진 대감님의 자제라는 사실이 그의 출가를 막은 이유였다. 절의 스님들은 그의 출가를 받아들이면 양반들이 그 일을 빌미로 절에 화를 입힐까 두려워한 것이다. 당시 유교가 지배하던 때라 스님들이 당신의 출가를 막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스님은 출가했다. 산중 절의 스님들도 굳은 의지를 이기지 못했다.

홍경스님의 서예는 16세에 이미 그 빼어남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이 친애하여 청나라에 보내는 공문서는 그에게 쓰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서법(書法) 가운데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는 독특했다. 서예를 잘 모르는 사람도 홍경스님의 글씨를 보면 단아하고 깔끔함을 느끼게 된다. 초서처럼 흘림체도 아니다. 칼날 같이 삐쭉삐쭉 강한 느낌을 주는 서체도 아니다. 도토롬하게 둥글어 아담한 모양의 글씨다. 스님의 글씨는 해인사 백련암 ‘장경각’ 현판에서 볼 수 있다. ‘藏經閣(장경각)’이라 쓴 스님의 글씨는 성철스님이 스님께 의뢰하여 쓴 것이다. 성철스님도 홍경스님을 좋아하여 당신의 서고(書庫)인 장경각의 현판 글씨를 홍경스님 필적으로 한 것이다. 홍경스님이 쓴 글씨의 서체는 청나라 말기의 서예가 하소기(何紹基, 1799~1873)의 서체다. 스님의 필적은 천축사, 서림사(은하사), 선암사, 양산 내원암, 석남사, 도리사, 제천 강천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우제 거사는 “스님께서는 돈을 받고 글씨를 써 준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런 스님이지만 상좌인 우제에게는 “너는 돈 받고 써 줘라”고 했다. 우제 거사는 “스님께서는 아마 내가 서실(書室)을 하여 먹고 살 줄을 아시고 하신 말씀인 것 같다”고 한다. 우제 거사는 스승을 닮아 서예에 빼어나다. 스승 밑에 있을 때부터 붓을 잡으면 잠이 안 왔다고 한다. 우제 거사는 “스님께서 쓰신 <금강경>은 통도사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능엄경>도 오어사에 있다”고 한다.

홍경스님 범패의 특징인 경기 범패는 한문에 능(能) 하지 않으면 못한다고 한다. 한문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고저장단(高低長短)을 뚜렷하게 해야 글자가 살아나고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우리말에도 ‘말(言)’과 ‘말(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범패를 할 때도 고저장단을 제대로 소리내야 한다. 우제 거사는 “영암스님께서 범패를 하러 우리 스님에게 오실 때는 산더덕을 푸짐하게 갖고 오셨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홍경스님은 석암스님과도 함께 재(齋)를 지내면서 범패를 했다고 한다. “석암스님께서는 원체 창(唱)이 좋으셔서 우리 스님이 내는 높은 음에도 가까이 따라 올라갔다”고 한다. 우제 거사는 “우리 스님의 범패는 허공에 맑은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다”고 한다.

홍경스님의 성정(性情)은 보통사람을 벗어날 정도로 괴팍했다고 한다. 법도에 어긋난 것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자운스님에게도 한 말씀 하셨다. 율사라면서 시계 차고 있다고. 구산스님이 표충사 주지로 있을 때 효봉스님을 동화사에 그냥 계시게 하지 않고 표충사로 모셨다고 한 마디 했단다. 어느 해 초여름 청담스님이 오랜만에 홍경스님에게 왔다. 무슨 일이 있는지 홍경스님은 그 때의 청담스님을 못마땅해 했단다. 수년간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그 날 만났는데도. 상좌들 가운데는 당신의 이런 성정에 못 이겨 제 발로 나가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찍히면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홍경스님은 당대의 종단 어른들과 여석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가졌다. 여석회는 갖추어 말하면 축성여석회(築城餘石會)라고 한다. 성을 쌓고 남은 돌 모둠이라는 뜻이다. 종단의 원로 스님들의 친목모임으로 일년에 한 차례씩 모여 종단을 걱정하고 본분사를 의논했다. 회원은 운허·홍경·영암·고암·벽안·구산·석주·자운·석암·청우·대휘·지월·서옹·월하·청담스님 등이었다.(무순)

홍경스님은 말년에 청량사에 주석하면서 지금의 청량사 터전을 닦았고 그 이후는 현 주지 운암스님이 홍경스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청량사 연혁을 옛 기록을 두루 찾아서 정리하고 약사(略史)도 작성,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청량사의 예와 이제를 소상히 알리고 있다. 전각 당우 주변환경 등 두루 중창하여 사격을 높였다. “제 나름대로 도량을 갖추고 홍경스님의 뜻을 더 널리 펴는 것이 저의 원력”이라고 운암스님은 포부를 밝혔다.

 

도움말: 성림·운암스님, 박우제·노규현 거사

자료: 화엄종주 홍경대선사비문, 불교신문 2555호

[불교신문3221호/2016년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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