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었으므로, 진다

이산하 지음/ 쌤앤파커스

홀로 배회하던 절간을 찾아

능소화 붉은 꽃처럼 서러운

저녁노을 물든 대웅전을 보며

오늘 다시 히크메트의 시를

별에게 들려주며 묻는다

‘내 여행은 시작되었는가’

수구암 법당에서 참선을 하는 저자. “수구암에서는 고개를 들 일도, 숙일 일도 없다. 그냥 수평자세로 보기만 하면 된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면 모든 것은 언제나 수평”이라고 말한다.

 

 이산하는… 1960년 경북 영일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이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로 등단, 1987년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한라산>을 발표했으며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석방 후 국제인권센터, 참여연대 등 인권단체서 활동했으며, 현재 활발하게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한라산>과 소설 <양철북>, 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 등이 있다. 어릴 때 스님이었던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경산의 한 암자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저녁예불이 끝나면 배롱나무에 기댄 채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외할머니와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며” 성장했다.

 

“운주사는 쉽게 들어갈 수는 있어도 쉽게 나올 수는 없는 절이다. 내가 본 수많은 절 중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한 절이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는 지리산 일대를 돌아 해남 땅끝마을로 가다 우연히 도둑처럼 슬쩍 스며든 절이다. 마치 넓은 계곡의 야외 조각전시장에라도 온 느낌이다. 헐벗은 숲속 응달마다 아직 녹지 않은 잔설도 잔설이지만, 산야를 힘겹게 물들이는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기대고 있는 돌부처들의 애잔한 눈빛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게 한다.”

1980년대 인기 소설이었던 <양철북>을 통해 심리에 대한 섬세한 표현력을 인정받았던 이산하 작가. 사찰을 찾는 그의 시선은 짙은 애정이 배어있다. 힘든 사람들이 찾아와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곳, 그들을 묵묵히 받아주는 곳이 그에게 각인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산하 작가는 고등학교 때의 고백으로 책을 시작한다. 스님이던 외할머니가 머물던 경북 경산의 한 암자에 어느날 백구두를 신은 젊은 객승이 찾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고열로 쓰러졌고, 며칠간의 병간호 끝에 깨어났다. 스님은 깨어나자마자 일주일간 면벽수행을 했다. 하루종일 벽만 바라봤단다.

“스님의 등에는 모기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렇게 수행을 마친 스님을 따라 나는 강가에서 저녁밥을 지어먹으며 노숙을 했다. 어둠이 내리면 스님은 하모니카를 불고, 난 별을 헤아렸다.” 저자의 첫 산사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저자가 소개하는 첫 사찰은 해남 미황사. 이어 청도 운문사, 순천 불일암, 제주 관음사를 비롯해 부석사, 해인사, 법흥사, 통도사, 운주사, 선운사, 보리암 등 국내 유명한 사찰을 한곳한곳 찾아 소개한다.

사찰을 찾은 작가는 그 역사 속에서 ‘슬픔’을 만난다. 한때의 영화를 간직한 사찰도, 모든 존재는 결국 사라진다는 진리만 남아 있기도 하고, 섬진강가에서 듣는 화엄사의 종소리는 애잔함을 끌어올린다.

“진관사는 오래전 내가 현상금이 걸린 긴급수배자였을 때 가끔 찾은 절이다. 25살의 청년, 그때 도망자로서의 내 은신처였다. 살얼음 위를 걷는 긴장의 나날들, 어둠도 복면을 하고 있었던 삼엄한 시절. 심신도 지치고 앞날도 아득해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홀로 이 절간을 찾아 배회하며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저녁노을에 물들어가는 대웅전 기왓장의 이끼는 차라리 허공에 목을 맨 능소화 붉은 꽃잎인 양 더욱 서러웠다. 오늘 다시 히크메트의 시를 별에게 들려주며 아직도 내 먼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의 제목 ‘피었으므로, 진다’는 선운사 동백을 바라보는 저자의 느낌이다. 많은 문인들이 선운사에 이르러 동백을 보며 시를 창작했듯 강열한 인상을 주는 꽃이 동백꽃이다. 저자는 “떨어진 동백꽃 생살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다. 한 생애가 이처럼 간명하게 분리되는 꽃을 난 아직 동백꽃 외에 본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위로 동학농민운동으로 사라진 선조들의 삶을 덧붙인다. 저자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백꽃을 바라보며 “다만 피었으므로 진다”고 넋을 위로한다.

우리나라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산을 가꾸며 만들어온 산사가 위치해 있다. 사찰은 천년의 문화를 만들어 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기쁨을 품어왔다. 전국의 산사를 찾아, 일반인들이 자칫 놓칠 수 있는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는 산사 기행문이 바로 이산하 시인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다.

[불교신문3219호/2016년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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